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과거 현재 미래
현재를 통해 과거는 미래로 침투한다. 도정일 교수의 책에서 만난 말인데, 일단, 멋있는 말이다.그리고 멋있는 것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말이다. 과거가 곧 미래가 되고, 미래는 곧 과거의 반영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이며, 동시에 먼 과거의 결과물이며, 먼 미래의 시발점이다. 즉, 시간에 있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그 자체로 한 몸통이기 때문이다, 라는 걸 생각하게 하는 진리에 가까운 말인 거 같다. 이 말을 내가 깊이 생각하는 건, 내가 지독한 과거집착자이기 때문이라고처음엔 여겼다. 그러나 그 깊이가 심각해질수록, 나는 어쩌면 과거집착자가 아니라, 철저한 미래지향자이기도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이 ..
2015. 3. 23.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14. 이강백 선생님과 초보 졸업
오, 마이 캡틴 이강백 마스터께선 졸업을 앞둔 수제자 김봉민을 앞에 두고 가라사대, 인생 누구나 초보다. 매해 매년 이 나이는 처음으로 사는 거라, 내 나이 환갑이 코앞인데 아직도 인생이 서투르다. 그러니까 곧, 인생에서 가끔 초짜짓을 저지르게 되더라도너무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다. 그러니 너무 쫄지 말라는 말씀이셨던 것도 같다. 꿋꿋하게 살라는 말씀이셨던 것도 같고. 그리고 이 말씀이 두고 두고, 졸업 이후, 인생 생초짜에 멍텅구리빠삐용스러운 행각을 벌인 내겐 힘이 되었다. 내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으며 징징거리기엔, 조금 민망한 것은, 나 만큼은 누구나 다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 은 아니다. 그냥 적기 귀찮다, 라고 말하는 것도 반만 맞다. 아무튼 그..
2015. 1. 15.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13. 나의 움직이는 예술 정의
존재의 본질을 바탕으로 한, 전형성을 탈피한, 원형을 새롭게 다루는 것들에 대한 기발한 생각, 표현 기법과 형식에 대한 파괴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선택, 21세기 세계를 감싸는 정신적 기류와그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 삶의 변화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일목요연한 기록. 이런 것들보다는, 이번 달 감당해야 할 카드값, 다양한 고지서와 그것에 적힌 숫자들, 빚지고 싶어도 더는 못 지는 나란 인간의 신용등급, 오르기만 하는 월세, 전세, 아부지 어무니가 시시때때로 바라시는 용돈, 하지만 대부분 회피해야 하는 얄팍한 심정, 이런 것들을 나는 예술이라 말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말이다.
2015. 1. 15.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12. 유서 형식
괴롭다. 이 세 글자 쓰는 것도 지금 당장은 괴롭다. 왜 괴롭나 생각하니, 내가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다. 캐주얼하게는 쓸 수가 없다. 글이란 결국, 연애편지, 일기, 유서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가장 볼만 한 법인데, 연애편지 같은 글은 너무 호기롭고, 일기는 너무 평면적이다. 내게 필요한 환타지가 없다. 그래서 늘 유서를 쓰듯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신세 한탄도, 희망 사항, 환타지도, 리얼도 있으니까. 허나, 그 유서 같은 글쓰기에 지친 셈이다. 너무 진지해져 버렸다. 유서 같은 글을 쓸 궁리에 빠지니, 우습게도 죽음에 대해서도 골몰하게 된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 그냥 죽음이 엄습하면구태여 피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맘에 빠진다.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면 죽는 게 낫다. 나는 ..
2015. 1. 15.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11. 액션왕
고질고질한 얼굴로 창문 열어, 내 인근 구린내는 방충망 너머로 일단 피신시키고. 눈곱을 떼야지, 아이디어는 손 쉬운데막상 손을 얼굴로 데려가려고 하면 난관에 부딪힌다. 이 귀찮음은 유서가 깊다. 좀체 박멸이 어렵다. 약속된 외출이 왕왕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구질구질한 얼굴에 물칠을 하고, 그 물은 수돗물이고, 비누칠을 하고, 사실은 폼클렌징칠이고, 다시 수돗물로 얼굴을 헹궈내고, 그 사이에 눈곱은 하수구로 갔겠지, 굳게 믿고, 수건질로 그 모든 세척의 액션을 끝맺는다. 그 수건은 누군가의 백일 잔치 기념이었다. 그 아기는 지금쯤 돌이 뭐야, 걸어다니며 말썽이나 부리고 있겠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스킨토너와 함께더 구질구질해진 얼굴에 쳐바르고, 방충망 같은 각막을 뚫고 눈물은 도망나와눈곱이라는..
2014. 12. 23.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10. 세계적 연극의 일개 청춘
배우, 작가, 연출, 무대감독, 음향감독, 무대디자이너, 소품 담당, 기타 등등의 스탭, 그리고 연극의 3요소 중 으뜸인 관객, 그것말고도 연극엔 오퍼 같은 게 있어, 있는데 아무도 잘 모르고, 누구나 되기를 꺼려하는, 극장의 최후방 망루이자 막장에서 야광의 불빛에 의지해 세계를 관찰하고 빛과 소리를 제어하는, 오퍼. 정확히는 오퍼레이터 같은 게 전 세계적으로 모든 극장에 있어. 착한 얼굴로 심부름도 하고, 몇 초의 타이밍을 못 맞추면혼나고, 혼날 땐 세계의 매뉴얼의 실체를 배운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뒷짐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자학도 해야 한다. 극장에 가장 일찍 왔다가 가장 늦게 가야 하는, 오퍼레이터는 원래는 배우, 작가, 연출, 감독 같은 것들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아무도 지금 당장은 시켜주지를 않..
2014.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