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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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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지옥철에서 그나마 살아가는 방법

by 김봉민 2015. 2. 23.

사진은 라이언 맥긴리사진은 라이언 맥긴리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더라. 이것을 인정하면 나란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보일까 봐 애써 외면해왔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침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낯선 이들과 몸을 부위 별로 부대끼며 회사로 가는 길은 당시 내 생활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지옥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그 역시도 지옥의 일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비오는 여름이었다. 비와 땀이 자아낸 각자의 끈적거림과 하반신 부위에 있는 제 3의 ‘젖은 다리’- 우산들은 나를 비이성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참을 수 있었다. 참아야지, 별 수가 없었다. 참는 수밖엔. 내 앞에 선 어느 뚱보 학생이 자신의 묵직한 둔부를 무기삼아 나를 뒤로 밀어재끼기 전까진. 


그것은 미묘한 경험이었다. 그 녀석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허나, 학창시절 2분단 혹은, 3분단 세 네 번째 줄에 앉아,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서 빵을 사먹으며, 게임 이야기나 떠들었을 법한, 한심하고도 뚱뚱한 뒤태를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 놈이 쉴 새 없이 엉덩이로 나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넓은 아량으로 뒤로 물러나주고 싶은 맘도 없진 않았지만, 내게도 그럴만한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 그 누구도 직경 40센치미터 이상은 그 지하철 칸 안에서 배당받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돼지, 아니 뚱보는 염치도 없이 자신에게 더 많은 공간을 내달라고 엉덩이를 통해 주장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어린놈이니, 징징거릴 수도 있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녀석의 무례함은 극에 치달았다. 뒤통수에 꿀밤을 날릴까. 안 된다. 그러다 행여 경찰서에 가면, 월급의 상당량이 박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들기며, 요놈, 그짓 당장 그만 두지 못할까, 하고 친절하게 타이를까. 그래, 이것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고 일말의 분란도 일으키지 않을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나다. 그렇게 온전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오지 못 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을 택했다. 손에 쥐고 있던 긴 우산의 뾰족한 끝을 그놈의 엉덩이에,


찔러 넣었다. 


정확한 각도 계산으로 녀석의 ‘코어’에 나의 우산은 깊이 진입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포석에 근거한 작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는 세상의 날카로운 맛을 알려주고, 나 자신에게는 통쾌함도 선사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이 방법은 실수로 가장할 수 있다는 이점도 존재했다. 뭐냐고 대들면, 미안, 이라고 대꾸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근데, 응당 돼지 멱따는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아니, 아니, 이럴수가. 그것은 상상을 능가해버리는 수준의 것이었다. 굵직한 뚱보 남학생의 괴성이 아니라, 


어머, 어머, 이게 뭐예요!


여타의 여자들과 다름없는 목소리. 그놈은 그놈이 아니라, 소년스러운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겸비한, 뚱보 20대 아가씨였던 것. 당황한 나는 일련의 사태가 실수였다고 변명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속사포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변태, 또라이, 미친놈 등등, 지하철 안 그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출근길. 나는 세상 가장 이상한 취미와 취향을 지닌 녀석으로 격하되어 버린 것이었다. 지옥철 안에서 나는 잔혹한 징벌을 받는 어린양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환승역에서 그 뚱보 이십대 여자는 내렸다. 내가 정신을 추스르고 가까스로,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해서 간신히 경찰서에 가지는 않았다. 흐트러진 정신으로 나는 출근해서 하루 종일 억울함에 벌벌 떨었다. 사실 알고 보면, 당한 건 나다. 그녀는 둔부로 나의, 그러니까, 아주 몹시 말하기 민망한 그곳을 내내 비벼댔던 것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그날 밤, 내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며 토로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깔깔깔 웃는 친구를 바라보며, 나도 결국 값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깔깔깔 웃었다.  


그리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싫다. 하여, 나는 ‘사람들’도 싫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무언가 억울하고, 당황스럽고, 짜증이 났던 모든 경험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스트레스, 혹은 슬픔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곳도 안다. 


그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나의 스트레스와 슬픔을 말하면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내 앞의,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내 안에 남는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사람’은 좋다니. 궤변일 수도 있겠다. 허나 뒷모습만 봐선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뚱보 이십대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듯, 세상엔 별별 생각과 마음이 다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나는 사람이 좋다. 결국, 사람은 사람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가끔 괴롭고 힘들더라도, 사람은 이 지옥철 같은 세상을, 사람 덕분에 살 수 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