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이었다. 그때 나는 21살이었다.
서울예대 극작과 04학번이 된 나는 상당히 부지런히 예술가코스프레를 시행했었다.
그리고 동기 중엔 81년생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는 스물 넷이었다.
우리 동기 중 에이스로 불리는 그런 누나였다.
그 누나는 기말 습작으로 '스물 다섯'이라는 대본을 써서 제출했고,
그 대본은 그 거지 같은 301호 강의실에서 공연하라는
눈물 겹도록 위대하신 고 오태석님의 지령에 따라 공연 준비를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허접한 그 대본을 내가 잊지 못 하는 이유는
그 대본의 주제 때문이다.
스물다섯 '씩이나' 되는 시점에서 아직도 자아를 찾지 못한 자기 자신의 신세한탄과
희망사항이 그 대본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하.. 스물다섯이 뭐라고.
자기 딴에는 얼마나 진지했는지 걸핏하면 그 동기 누나는
자신의 늙어감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었지.
나는 그때 그 누나에게 이렇게 얘기했어도 괜찮았을 거다.
누나. 주접 좀 떨지 마.
요절할 게 아니라면 나중에 더 나이 먹고 이런 걸 썼다는 게
얼마나 쪽팔리게 될지 좀 미리 헤아려 봐.
얼마 전엔 집 근처 국수집에 갔었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 집인데, 한 할아버지가 입성하더니
주인에게 반말로 자신은 이런 거 못 다룬다며 툴툴 거렸다.
제법 거북한 말투로 자신이 받아야 할 대접은 이따위가 아니란 식의 논리를 설파했다.
주방에서 나온 주인은 네네, 하며 할배 대신 주문 절차를 수행해줬다.
카드 긁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키오스크. 못 다룰 수 있다. 그건 그럴 수 있단 말이다.
하. 근데 언제 봤다고 반말인 건가.
왜 국수집 주인장을 자기돈 수 천 만원 쌔벼 간 막 돼 먹은 손자 대하듯
그러느냔 말이다.
늙으면 예의와 매너의 먹이사슬 최정점에 저절로 모셔지고,
그 위치를 십분 만끽해도 된다는 헌법 조항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저 할배, 많아야 일흔도 안 된 거 같은데,
그렇다면 고작 20년 전에는 오십밖에 안 됐을 거 아닌가.
자기 쉰 살일 때, 20년 후 자신이 이런 노인네가 될 것임을 상정을 했을까.
다시 나는 나의 81년생 동기 누나를 생각해본다.
그 누나는 그때의 자기 습작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고작 스물 다섯.
또한 바로 그 국수집 할배도 떠올려본다.
20년 전에 50살이었을 지금의 70살 인간.
무엇보다 이제 마흔이 코앞인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늙을래? (일단 주접 떨지만 말자)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안 죽고 마흔이 되어 다행이다)
어떤 늙은이가 되어 어떻게 죽고 싶은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