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를 두려워 하는 쫄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게 거짓이 아닌 사람이면 과연 좋으려나?
나는 실패가 두렵다. 죽도록 싫은 게 실패다.
연전연승의 신화를 꿈꾼다. 그러나 그게 가능하다면 그게 과연 인간인가.
꿈이란 것은 불가능하게 보여야만 꿈이라고, 누가 그랬다.
가능해 보이는 꿈은 꿈이 아니라 그럴듯한 계획일 뿐이라고도 그가 말했다.
시지프스의 수레. 안 될 걸 알면서도 계속 도전하는 그 심정과 그 모습이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는 이유라는 말에 나는 공감했다.
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는 꿈을 꾸었고,
결국엔 이 글의 제목처럼 완패 확정을 선언하려 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는 저주 같기도 한 꿈을 갖게 된 것은
'마리카에 관한 진실'이라는 스웨덴 드라마가 있다는 다큐를 본 이후부터였다.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맘 먹는 진정한 서사 예술에 있어 형식적, 내용적 혁명이라
판단하였기에 나는 진정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만개를 이루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2011년. 나는 어떠한 디지털 콘텐츠 회사(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그냥 블로그 포스팅 만들어내는 소기업)에
입사한 지 1주일도 안 되어 이사를 찾아가 기획안 같은 걸 제출했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전혀 원할 리가 없는 것이었고, 나에게 회사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한낱 포스팅 원고 잘 쓰는 것일 텐데도 나는 그러고 있었다.
어휴, 얼마나 내가 한심했을꼬. 여하간, 나는 연극을 관둔 후에도
2번의 연쇄 창업을 했다. 자본금이랄 것도 없는 주제에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법인사업체를 꾸리느라 경제적으로 늘 죽을 맛이었으나,
나에겐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는 꿈이 있었다.
이 지구상에서 그 어떤 단체보다도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잘 구현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말이 좋아 작가이지, 사실상 제작자와 프로듀서의 부품으로 전락한
극작가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 여겼다.
나는 극작의 내용 뿐 아니라 문화 산업 전반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양상을 자아내고 싶었다.
작가는 수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대가리이며 몸통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설령 내 현실이 쪼그라들더라도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었고,
그 수단이 바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었다.
허나, '마리카에 관한 진실' 이후에 찔끔찔금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세상에 선보여지긴 했어도
결국엔 하나의 죽어버린 방법론이 된 이유도 지난 6년 간 처절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영상 하나만 잘 만드는 것도 벅차거늘, 음성 콘텐츠도, 활자 콘텐츠도, 모두 다 잘 만들어야 한다는
기획과 제작 단계에서의 중압감은 대기업 규모의 인력풀과 자금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유튜브 채널 하나 잘 키우는 것도 어려운데, 팟캐스트 하나 잘 키우는 것도 어려운데,
최소 콘텐츠 채널 서너 개를 동시에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미 실패를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골몰하며 생긴 만성 두통. 답답하니 줄창 찾게 되는 맥주.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는 이유는
내가 돈이 없기 때문. 그러니 꿈이 아니라 현실을 쫓아 영월군청, 포천문화재단, 성남시청 등을
기웃거리며 돈 되는 일을 받아와 처리해야 했다. 그게 또 뭐라고 나는 자존심 상해서 씨불씨불 거리면서
간신히 일단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중단한 채 단편영화 제작에 나섰던 것이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가뿐하게 회당 촬영비가 400만원에 근접하는 영화.
이번엔 어떻게든 완성을 시킬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매번 이렇게 뭔가를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구나 싶다.
결국엔 이 가난한 내가 독립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하겠다고 나선 것부터 안 될 일에 매달렸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다가 중단하고 이번 가을부터 또 나는 마음속에 접어두었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허나 또다시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문제들을 반복해서 앓고 있다.
머리가 아프지만, 방법을 찾고 싶다. 근데 그때도 그랬었지.
머리가 아팠지만 방법을 찾고 싶었었지.
그때 내가 심대하게 못 난 인간이라 방법을 못 찾았던 게 아님에도
이번엔 왠지 될 거 같다는 신앙적 믿음을 발동시키며 발을 동동 구르며 불면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모든 문제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같은 것에 있었던 게 아니라,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나라는 인간의 거대한 욕심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독립적이고 싶다.
그래야 가장 창의적인 걸 만들 수 있다.
내 작업의 결과물로 인해 근본적으로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나란 인간의 가치는 좀 상승될 수 있을 거다.
나의 포부는 늘 그런 것에 겨냥되어 있던 것이다.
이 욕심의 문장들에 과감한 손질을 가해야 하는 것인가.
그 답은 미뤄둔다. 대신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대해선 나의 완패를 확정적으로
선언하는 게 우선이겠다. 나는 완전히 졌다. 내가 연극을 떠났을 때처럼
이제 다시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바라볼 일은 없다.
나는 이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때에만 비로소 이 실패를 되치기 하여, 실패가 실패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30대를 꼬박 실패로 점철시킨 것이 후회스러운가.
나는 실패가 두려웠다. 죽도록 싫은 게 실패다. 나는 심각한 수준의 쫄보다.
그러나 그보다 싫은 건, 무기력해진 나 자신이다.
실패가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버리면 살아도 죽어 있는 거라 여겼다.
죽도록 싫은 게 실패였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나의 청춘에 불성실하게 스스로 대했으면
그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꼬라지가 가장 싫었다.
그러니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독립적이고 싶다.
그래야 가장 창의적인 걸 만들 수 있단 말이다.
내 작업의 결과물로 인해 근본적으로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나란 인간의 가치는 좀 상승될 수 있을 텐데, 는 틀렸다.
나는 이미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므로,
행여 내 작업물의 결과가 구리더라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
다만 내 작업의 결과물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더 잘 지키고
좀 더 안락하게 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그 수단은 여전히 글쓰기에 있다.
그래, 그러니 계속 써보자.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