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자는 말의 헛점.
그건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자는 걸 바라고 있다는 것에 있다.
바라지 말자는 것마저도 바라는 말아야 진정 바라지 않는 것이라는 게 되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건가.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온다라는 말이 퍽 자주 머리에 떠올리는 유형의 사람이다.
아마 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이 아닐 리는 없다.
그리고 비가 오는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리 없는 사람이고,
너무 바라지 말자는 말의 헛점에 대해 고민도 해보는,
피곤함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닐 리 없는 사람이다.
말장난이 길어지기 전에..
이젠 내가 대면해야 할 것에 대해 써보려 한다.
비가 온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어떻게든 내게 전달하려 하는데,
참으로 환장할 노릇인 것은 자기 입장만 있다는 것이다.
단 1초도 내가 살아오며 보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자신은 완전한 엄마이므로 이러한 사태들은 모두
사람 아닐 리 없는 나란 사람의 사람답지 않은 작태들로 여기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추정한다.
엄마는 그런 나를 감내하고 있다고 스스로 단정하고 있고,
내가 느낀 고통은 한낱 괴상한 형식의 어리광으로 치부하고 있을 거란 뜻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란 인간을 키워내는 데 투여된 금전적 가치들을 어떻게든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급함도 품고 있을 터다. 이젠 명백한 할머니가 되었기에 상환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갖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의사가 없다. 나는 내 인생을 산다.
나는 나를 도구화 하려는 그 어떠한 의도에도 동참할 뜻이 일절 없다.
뺨으로 맞는 것도 싫지만 칼로 쑤셔지는 건 더 싫다. 그리고 싫은 건 매한가지, 다 그냥 일단은 싫은 것이다.
아빠도 싫고, 엄마도 싫다. 형도 마찬가지다. 그래, 너 그때 그랬겠구나, 같은 걸 내가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 여유랄 게 없는, 사람 아닐 리 없으나 나에겐 사람 이하였던 사람들에게 나는 그런 걸 바랐던 것이다.
너무 많은 걸 내가 바랐던 것이 패착이 되어 나는 인생 전반에 걸쳐 우울이 정착되어 버려서
비가 온다, 같은 문장을 머리에 달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아무리 거세게 울부짖어도 귓속 달팽이관만을 울릴 뿐, 마음엔 닿자마자 튕겨져 반사가 될 말들을
나는 줄창 내뱉어왔다.
다행인 것은 내가 완전히 가족들과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심한 그날 이후부터,
아침에 눈 뜨면 맘이 그 이전보단 현저히 덜 괴롭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내가 십년 정도, 심하게 아팠단 사실을 자각했다.
나는 환자였구나. 다신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가 너무 아파서
어딘가에 호소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것 뿐이다.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설령 불행에 진입하게 되더라도,
그조차 나의 자율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생긴 현상이어야지,
나 아닌 이의 요구에 의한 것일 순 없다. 나의 생명을 걸고 그건 막아야 한다.
오늘은 이종사촌 누나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엄마의 종용으로 인한 카톡인 게 뻔히 보이는 그 내용.
설득력이 확보된 언변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나이 먹어버린 인간의 약자인 척 하는 악한 의도의 말.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여지 없는 무응답으로 인해
화양리 여관을 전전하며 살았던 나다.
알고 보니 그때 노인대학 시험기간이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그 말들에
아연실색을 했었다. 비가 온다. 소나기다. 너무 많은 걸 바랐었다는 반성을 토대로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 바란다. 소나기가 아니라 태풍이 오더라도 그냥 맞자.
버티자. 나약한 인력에 이끌리지도 말고, 요란한 척력을 발동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자. 나는 그런 나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