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낀 제주도 돌
2015년 6월 7일 – 여행 3일째 새벽
어제. 부산 광안리에 자리한 거지 같은 여관에 있다가,
오늘은 뭐하지, 그러고 있다가
전철 타고 가는데 경성대역에 당도해 문이 열렸고,
원래는 부산역에 가려고 했었지만,
그냥 내렸다. 그리고 경성대에 잠입해 노자의 무유상생과
가물가물한 세계의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자세,
관계와 관계와 관계 같은 개똥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여수? 경주? 아님 그냥 다시 서울?
열차티켓자동발매기인지 자동열차티켓발매기인지 헷갈리는
것 앞에 막막하게 서서, 인간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과 목표를 세우는 게 아니라,
계획과 목표가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에
어떻게서든 계획과 목표를 쥐어짜내는 것이고,
가끔은 그것에 그럴듯한 포장을 가해
밝은 미래, 희망찬 내일 같은 환상으로 둔갑시키는 것 아닐까, 하고
궁리했다네.
그래서였나. 여행자의 묘한 긴장감과 언제가는 닥칠
금전적 고충에 점점 무거워지는데
잠깐 쉬었다 생각하자며 역전 다방, 은 아니고
역앞 탐앤 탐스에 들어가 이런저런 교통편을 알아봤는데,
글쎄, 제주도 항공권을 3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김해공항으로 직행해 지금 이 시간 나는
여기에.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별뜻 없었지.
서울역에 도착해 효인이 본다는 명목이나 삼고자 창원에 가려다가
기차표 시간대가 너무 뒤에 있어 제비뽑기 하듯 고른 게 부산.
그런데 부산엔 한 번 왔었는데, 그게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언제나 늘 항상 익숙한 것에 기대어 산다.
효인이도 그렇고 부산도 그렇고 그나마 익숙하니까
직관적으로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산에 도착해서도
그 옛날 한 번 가봤던 차이나타운 콩국집과 밀면집부터 찾게 되더이다.
거기에 해운대로 갈까, 하는 생각까지 더해지니,
기분이 더러웠다.
사람은 언제나 늘 항상 익숙한 것에 기대어 살고, 또한
언제나 늘 항상 익숙한 것에 기대어 살기에
혁명 같은 건 이룰 수가 없는 거니까.
요즘 나의 테마는 혁명이다.
세상의 혁명? 웃기는 건 다른 때 하자.
내 관심사는 나 자신에 대한 혁명.
나는 어느새 사는 대로 생각하고, 주어진 것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이건 나름 괜찮은 삶이라고 자위하기에 이르렀다.
뭐 이것도 여타의 인간들에게는 나쁘지 않겠지만,
내 자위는 나한텐 턱 없이 과하다.
돈 쓰는 것에 흥미를 갖고, 그저 술 마시는 재미에 길들여지고,
그러면서 기괴하기 이를 데 없이 글은 안 쓴다.
나의 자위가 나쁜 건 내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에 있다.
나는 내가 글을 써야 한다고, 나 아니면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독보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세상에 보여줘야 하며,
그래야만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살 수 있다 믿고,
그걸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는데,
배반이랄까, 아니면 농락이랄까. 아무튼 좋은 용례로는 쓰이지 않는
단어로 나 자신을 야금야금 무너트렸다.
세상에 좋은 걸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살고 싶어.
해야 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해야겠어.
그런데 내가 계속 나를 속이고 비겁하게 피하는 꼴이란.
형제의 밤은 6차 공연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내가 한 게 뭐가 있는가.
터럭 만큼도 안 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나는 그래서 해운대가 아니라 광안리에 갔다.
물론 그나마도 예전 스타크래프트가 인기 있을 때
프로리그의 결승전이 광안리에서
펼쳐졌다는 걸 기억해낸 것에 기인할 확률이 몹시 크지만.
그러나 혁명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거고,
다행히 조금씩 나아졌다고 치자.
제주도에 도착해선 닥치는 대로 간다.
가장 먼저 온 버스 타 버리고,
멋대로 걸어다니다가 그냥 음식 잘할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 먹고, 아무 모텔에나 들어왔다.
이러니까 신난다. 이러니까 기운이 생긴다.
결국 어디를 갔었어도 중요하지는 않고,
다만 이런 자세와 기운이 생성되는 게 내겐 중요했다.
부딪쳐야 열린다.
깨지고 멍들고 피나더라도
타진해보지 않고는
성패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주눅들고 하던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가치 있는 것을 써낼 수가 없다.
우습게도 이곳에 도착해 바다 보러 가다가 어느 포스터를 봤는데,
전 여자친구도 아무래도 제주도에 온 것 같다.
내일 하루 제주도에서 공연을 한댄다.
내가 제주도에 온 계기의 촉발점은 분명 그 인간이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여기에 온 것 같다.
우리는 그때, 얼마나 제주도에 같이 가자고 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여기.
우수에 젖는다거나 운명을 탓하며
주먹 불끈 쥘,
이유는 없다.
오버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보자.
일주일에 꼬박꼬박 신촌에도 가고,
우리는 제주도보다 작은 서울 하늘 아래서
앞으로도 숱하게 각각 살아갈 텐데,
과한 낭만에 취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봐서는 안 된다. 경멸스러운 인간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지 말자.
지옥이며 전쟁터인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지만,
절반짜리 진실에 매몰되지 않고, 끝끝내 아름다움과 사랑도 상상하는 나.
절망도 희망도 믿지 않고 묵묵한 힘에 근거해 살아내는 나.
그리고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맹신하지 않고,
언제든 스스로를 깨뜨리고 새로워지는 나.
그렇게 천천히 개인적 혁명을 완수하자.
그럼 비로소 세상에 대한 혁명도 가능해질 것이다.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제주도 일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