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좀머씨와 걷기와 나
사진은 역시 라이언 맥긴리
나는 요즘 많이 걷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한 시간 가량, 혹은 그 이상을 걸으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 기분이 그 만큼 가벼워진다.
그리고 생각한다. 좀머씨도 이런 기분이었나.
결국에 인간은 자기가 가까이 두었던 것에 닮아 버린다.
소설 <좀머씨 이야기>는 내게 가장 특별한 작품이다.
좀머씨는 자는 시간 빼곤 항상 걸어다닌다.
심지어 살인적인 우박이 떨어지는 날에도,
"그러니 날 좀 제발 내버려 두시오!"
라고 소리치는 인간이다.
폐쇄공포증 때문이다. 그는 갇혀 있을 수 없다.
갇혀 있을 수 없으니 항상 밖에 있어야 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그 역시 '현재'라는 시간에 갇힌 것이니
계속 지구 위를 걷는 것이다.
걷고 있는 와중에는 기분이 좀 나아졌겠지.
걷는 게 갇혀 있는 것보다 괴로웠으면 그렇게
걸어다닐 수는 없었을 테다.
나는 이 소설을 형이 2층에서 점프한 후에 읽었다.
그것은 나의 점프가 아니라 명백히 형의 점프였는데,
착지에 따른 처철한 완충력은 내가 더 많이 감당했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좀머씨 이야기>는 형의 병실에서 가져왔던 책이다.
나는 이런 소설을 써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동경했고,
항상 걸어다니는 좀머씨를 상상하며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략 20년 정도가 흘렀다.
저절러 그렇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내 인생의 원주가 타인에 의해 찌그러지지 않는
날을 갈망했던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민증은 진즉에 받았겠다, 친구들은 죄다 결혼했겠다,
빼도 박도 못하게 성인은 되었다.
그러나 성인과 어른은 다르다. 내가 바라던 어른이,
나는 아직 되지 못 하였다.
나는 좀머씨를 아직도 가까이 두고 산다.
그 영향이 아직도 내게 묻어있다.
또한, 되짚어보면 그밖에도 나는,
내가 그토록 가까이 두었던 사람들,
현실 세계의 그 사람들을 닮아버렸다.
오래 되었다고
다 지난 일
이 아니다.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충분히
지금 이 순간의 일이다.
형처럼 가까운 인간은 주기적으로
2층 같은 곳에서 점프 비슷한 것을 하고,
나는 원하지 않은 그 완충력을 버티고,
좀머씨로 하여금 폐쇄공포증에 걸리게 했던 전쟁 같은 사건은
내 인근에서 매일 같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걷는다. 허나,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두시오,
그런 소리는 안 한다.
닮아버렸을 뿐, 완전히 동일화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 어떤 물질과 정신으로도 나를 함락하지 못 할
나만의 그것이 나한테 있기에, 나는
그러니 날 좀 내려버 두시오,
좀머씨의 대사를 하지는 않는다.
땀이 마르고, 이어폰을 꽂고,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걸어서 돌아간다.
나의 걷기는 방랑, 떠돌기, 도망이 아니라,
머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가 비밀리에 아무도 모르게 내 옆에 두고
오랜 시간 바라보았던 '그것' 덕분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지 여기에 적지 않도록 하자.
머물고 싶은 곳이 얼추, 머릿속에 그려지면
다른 지면을 활용해 더 상세하게 적자.
이렇게 쓰고나니, 마치 땀을 흘린 것처럼 기분이 가벼워졌다.
계속 걷고, 땀도 계속 흘리고, 이렇게 계속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