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가르치는 언론고시 학생들의 결과가 좋다.
그래, 자랑이다.근데, 어쩔꼬. 사실인 것을.
이번엔 채널A 공채 PD에 합격한 학생이 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나는 정말 이 친구가
합격할 것을 알았다. 왜냐고? 그만큼 준비도 많이 했고,
PD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더라고.
괜히 한 번 폼잡으며 언론고시에 침 한 번 흘려보는 언시생이 있고,
정말 목숨 걸고, PD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방송국 공채에 임하는 언시생이 있다.
전자는 양아치이고,
후자는 예비 PD다.
각설하고, 아무튼 이 친구가 연습했던 작문 2편을 공유해본다.
아울러 내가 제작한 언론고시 교본도 공유해본다.
봐서 해 될 리는 없다.
촘촘하게 읽어보길 바란다.
<시제: 내가 발견한 것>
2018년, 남녀가 똑같이 사랑 받는 사회. 페미니즘의 사회다. 남녀가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그래서 30살에 직장도, 명예도, 이룬 것이 하나 없는 망한 인생의 대명사, 백수인 나는 이제 ‘장업’을 노려본다. 장가와 취업을 합친 합성어다. 예전에 결혼으로 팔자를 피려는 행위를 ‘취집’이라 불렀지만 이젠 남녀평등의 시대 아닌가. 날 구원해줄 여성을 발견해 ‘장가’로 내 팔자를 고쳐보련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회사는 가입하시면 최대 2년까지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아 드립니다! 그런데... 남성분이 결혼하려면 일단 집이 있으셔야 해요.”
찾아간 결혼 정보 회사 <듀오> 매니저가 말했다. 부동산 침체기에 집이라니. 절망스러웠지만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 먼저, 담배부터 끊었다. 담배 한 값이 4500원, 내가 일주일에 다섯 갑을 피니까 일주일이면 22500원, 한 달이면.... 90000원! 그리고 교통비도 아껴보기로 했다. 나야 가진 게 몸 밖에 없는 백수 아닌가. 아직 팔팔하다. 버스비가 1200원 정도니까 하루에 한 번씩 이동한다 치면 왕복 2400원. 그렇게 한 달이면... 7만 2천 원.
아직 부족하다. 매달 16만 2천원으로는 턱도 없다. 그때부터 시작했다. 신문 배달, 공사장 일꾼, 주유소 등. 오직 ‘장업’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면야. 백마 탄 공주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밤낮을 아르바이트로 10년 일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손에는 ‘원주 한가람 아파트’ 계약서가 손에 쥐어 져있었다.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 집을 구했다.
“고객님, 요샌 남성분이 결혼하려면 요리를 잘해야 해요. 요섹남 아시죠?”
이럴 수가. 10년이 지나니까 요리까지 잘해야 하나보다. 사랑 받기 참 어려웠다. 요리라곤 해본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해야 했다. 내 장밋빛 인생을 위해서. 그깟 요리가 뭐 얼마나 힘들겠는가. 바로 <현석 초이의 요리 교실>에 등록했다. 상추 썰기부터 멋지게 소금을 뿌리는 포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요리에 매진했다. 요리가 이렇게 힘든 것일 줄은 몰랐다. 굳이 이걸 삼시 세끼 다 차려 먹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부디 백마 탄 공주님은 외식을 좋아하길 빌며 장장 1년 만에 요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고객님, 요샌 집안일...”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그까짓 거 30년 동안 집안일을 하신 어머니에게배우면 됐다.
“집안일을 도와주겠다고?”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했지만 내심 기쁘신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집안일이 시작됐다. 빨리 배우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일은 쉽지 않았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설거짓거리와 화장실 청소, 그리고 조금만 방심하면 쌓이는 먼지들. 집안에 이렇게 할 일이 많았다니.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것만 버티면 이제 내 인생도180도 바뀔 수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달려오는 백마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6개월. 이젠 어머니가 늦잠을 자도 괜찮을 정도로 집안일을 마스터하게 되었다.
“가입되셨습니다. 고객님의 결혼 정보 등급은...D 등급입니다. 아쉽게도 나이가 나이인지라...그래도 중년의 남자분들만의 매력이 있으니 기다려보시면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집도 마련하고 요리를 배우고 집안일까지 습득했지만 내 결혼 등급은 D였다. D라니. 처참한 결과에 암담했지만 그래도 등록한 게 어디인가. 나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분명 날 알아봐 줄 ‘조랑말 탄 공주님’ 정도는 있을 테니까.
10년을 모아 산 강북 한가람 아파트에서 살며 기다렸다. 한 달, 두 달... 일 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길 2년째. 드디어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듀오>입니다. 회원님의 계약 기간 2년이 다 되어서 연장을...”
뚝. 끊어버렸다. 오라는 공주님은 안 오고 계약 연장 전화라니. 하지만 괜찮았다. 2년을 지내다 보니 ‘장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누구에게 손 안 벌리고 혼자 집을 장만했고, 혼자 요리해서 삼시 세끼 차려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돈으로는 아니지만 부모님의 집에 간간히 찾아가 집안일을 해드리며 작은 효도를 해드릴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과거와 다르게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니지 않은가! 이 정도면 괜찮은 삶 아닌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 난, 내 인생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
-언젠가 증손자에게 물려줄 작은 물건 하나 고르고,
그것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야기를 만드시오
정성스레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쨍쨍한 햇빛에 말린다. 증손자에게 깨끗한 모습으로 물려주고 싶었다. 빠삭한 햇볕위에서 말라가는 ‘가발’을 보니 과거가 떠올랐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희망, 용기 그리고 약간의 돈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무리 희망, 용기 그리고 돈이 있어도 머리카락이 없으면 대한민국에서 남자로서 살아가기 힘들었다. 대머리는 용모단정이 아닌 사회였으니까.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난 20살부터 정수리 쪽 원형 탈모와 이마 쪽 M자 탈모가 시작됐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을 놓치기 싫었다.
후두둑.
8만 개.
처음에는 ‘희망’을 품었다. 비록 탈모는 외탁이라는 말이 무섭게 외할아버지가 대머리였지만 아버지 유전자의 힘을 믿었다. 아직까지 머리가 풍성한 50대 아버지를 닮았길 빌었다. 비어있는 곳을 가리기 위해 부분 가발을 써야 했지만 프로페시아라는 탈모 방지약을 먹고, 버텼다. 부분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될 그 날을 기약하며. 하지만 25살 군 제대와 함께 내 정수리 머리카락들도 전역해버렸다. 더 이상 가발을 고정할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친구들조차내 생일날 ‘탈모 방지 샴푸’을 선물해 주기 시작했다.
후두둑.
5만 개.
이제는 ‘용기’를 냈다. 차라리 잘 됐다. 절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니 ‘혹시...’라는 희망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투블럭 스타일로 멋을 냈던 가발을 벗어 던졌다. 남자들만 간다는 ‘블루클럽’ 미용실에 가 당당히 외쳤다.
“1mm로 삭발해주세요”
더 이상 감추지 말자. 당당하게 대머리로 다니기로 했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기까지 소개팅을 부탁했다. 남자는 자신감. 여자는 남자의 박력에 반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친구들이 마련해준 20번의 소개팅 동안 이상하게도 소개팅녀들은 다들 집안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거나, 갑자기 회사에서 업무가 과중해지거나 1주일이 지나도 카카오톡 ‘1’이 지워지지 않는 실종 상태가 됐다. 역시나 가발은 필요했다. 난 다시금 가발을 머리에 얹혔다.
후두둑.
3만 개.
마지막은 ‘약간의 돈’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머리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삼송, 횬다이, 쌈양 등 대기업 면접에서도 용모 단정에 걸려 번번이 탈락했다. 그때, 개그맨 엄경환씨가 광고하는 ‘모발이식’이 눈에 들어왔다. 맨들맨들한 뒷동산 같던 머리가 풍성한 잔디밭이 되어 있는 비포 앤 에프터 사진을 보고 순간 이성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상담을 마치고 견적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돈’이 문제였다. 500만 원의 비용을 취준생의 형편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친구들에게 알흠알흠 돈을 빌려 겨우 500만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신세를 고치고 두 배로 갚으리라. 29살 겨울 11월. 내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날 ‘모(毛)드림 성형외과’에서 모발이식 시술을 받았다.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모낭들도 두피에 안전히 착상하길 빌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상님의 유전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새로 심은 모낭들은 조상님의 유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훨훨 떨어져 버렸다. 그 어떤 노력도 나의 두피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뚫지 못했다.
후두둑.
0개.
30살의 나는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발을 평생 써야 하는 내 운명을. 내 인생에 머리카락은 오직 이 ‘투블럭으로 자른 가발’뿐이라는 걸. 하지만 가발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내 운명뿐이 아니었다. 바로 ‘친구’였다.
비록 10만 개의 머리카락들은 날 떠나갔지만, 힘들 때 탈모방지샴푸로 도움을 줬던 친구들, 대머리인 내게도 꾸준히 여자를 소개시켜줬던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때 선뜻 큰 돈을 빌려줄 수도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비록 머리는 없었지만 ‘진짜 친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내 증손자에게 내가 썼던 가발을 건네주며 말하고 싶다.
“세상은 희망과 용기와 약간의 돈, 그리고 ‘친구’와 함께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단다”라고.
난 빠삭하게 마른 가발을 털며 손자를 기다렸다.
후두둑.
-끝-
참고로, 언론고시 작문을 연습하면서
단편 소설을 많이 읽는 언시생이 많다.
허튼짓이 관두자.
언시 작문은 단편소설 분량의 10분의 1도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
단편소설만을 보면서 장편소설을 쓸 계획을 세우는 것과 동일하단 얘기다.
언론고시 방송국 공채 전형 작문은 단편소설과 별 상관이 없다.
언시 작문을 연마하려면,
말 그대로 양질의 언시 작문을 보고 분석하며, 모방해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공유하고 있는 최종 합격자들의 연습 작문은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몇 개 더 공유할 것이니,
필요한 사람은 종종 이 블로그에 들려보길 바란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