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통,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플롯이 내 안에 있다.
그러나 요즘 통, 안 보는 이유는,
요즘 통, 안 보는 이유가 되어버린 이유가 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별 시덥지 않는 이야기나 늘어놓다가
그 정도의 충고밖엔 해줄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오히려 들으면 힘이 더 빠지는 그런 말을,
아주 집중한 표정으로 듣다가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닐까나.
또한, 역으로 별 시덥지 않은 고민을 마치 굉장한 이야기인냥,
듣는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나.
솔직히, 좀스럽다 할 수 있겠으나, 수 만원이 깨지는 건 기본일 테고,
약속 장소로 왔다갔다 하며 드는 시간도 아깝다.
외출하면, 집에는 코딱지 만한 크기의 강아지가 떡하니 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모습도 내내 아른거리며 미안해질 게 뻔하다.
이런 형편이니 요즘 통,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뭔가를 해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뭔가의 이름은 아무래도 '불안함'이겠지.
그 버거운 걸 혼자 노려보는 게 괴로우니, 잠시라도
주의력을 다른 데 분산시킬 필요가 그땐 명백히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그런 임시방편이 안 통한다는 걸 안다.
글발이 아무리 좋아도
플롯과 로그라인과 아웃라인이 구리면 다 소용없다.
(어째, 왜 이 스토리텔링의 핵심 용어 세 개는 다 영어인 건가.
어쭈. 스토리텔링도 영어다. 이 네 개. 내가 다 한국어로 번역해봐야겠다)
글발이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면,
플롯과 로그라인과 아웃라인은 내 본질, 근본에 해당할 텐데,
나란 인간의 삶의 플롯과 로그라인과 아웃라인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문제 해결'의 장으로 인식하는구나.
그게 잘 안 되니,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맞춤법을 틀리거나
사람들과의 만남을 비문으로 마치고.
사람들과 만나서 단순히 놀고 즐기는 걸로 여기지를 못해.
나는 사람들한테 바라는 게 많다!
그래서 그게 좌절 되느니 오히려 그 원천을 제거하자는 식으로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고 내 플롯과 로그라인과 아웃라인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본질, 근본은 안 변한다. 그걸 바꾸려는 시도보단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을 것.
하지만 플롯을 이야기추진유형,
로그라인을 이야기핵심사항,
아웃라인을 이야기구조,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놀고 즐기는 기회'라고 번역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지 싶다.
억지 번역은 낯설다.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기다려보겠다는 자세가 그나마 임시방편이 아닌,
만병통치의 애튀뜌드이겠지. 이상하다. 아무튼 뭔가 다 이상하다.
그럼 이만, 이 허섭한 이야기추진유형의 일기를 아무렇게나 막, 대충 마치자.
*참고로,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로 설득하기'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