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사십부터라고
나는 요즘 부쩍 자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으론 이미 알고 있다.
인생은 내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 무슨 언어농간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아직 마흔이 아닌데,
그렇다면 근래의 내 인생은 인생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왜 대책 없는 희망적 메시지 발설에
힘쓰고 있는 것인가.
왜긴 왜야.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없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현재를 제대로 버틸 수 없으니까.
지구 멸망이 곧 도래한다고 하면,
작금의 사회 시스템은 그대로 붕괴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러나 또 웃긴 것이 미래의 미래의 미래에 이 태양계는
태양의 소멸로 인해 끝날 것이고
지구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하게 될 텐데,
미래의 미래의 미래까지는 구태여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도 미래의 미래의 미래엔 결국 죽는다.
사람은 다 죽는다.
사람은 그저 가까운 미래만 생각할 뿐,
멀고도 먼 미래를 생각하는 덴 적합하게 생겨먹은 것 같아.
나는 죽는다. 22세기의 세상을 못 보게 죽을 것이 틀림 없다.
기술 발전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여 어떻게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김봉민 + 기계'인 것이지,
오리지날 '김봉민'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죽는다.
나의 인생은 내가 원치 안 했음에도
1984년 2월 16일에 시작되었고,
나는 미래의 미래의 미래엔 분명히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일단 사십살이 되고 싶다.
그때 내가 암에 걸렸거나 팔 하나가 댕강 잘려 외팔이가
되더라도, 혹은 외눈박이가 되었더라도,
나는 사십이 되고 싶다.
나는 죽기 전까지는 살고 싶다.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거니까,
살아있고 싶다. 설령 내 인생 마흔에 끝나더라도,
나는 거기까지 가보고 싶다. 이건 언어농간이 아니다.
행운이 닿는다면, 뭐 다른 상황이 전개되어
내가 상상도 못했던 현실과 직면할 수도 있겠지.
몰라. 그거까지 내가 어떻게 아나.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죽기 전까지 대책 없어 보이라도 부지런히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발설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자.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죽기 직전에
마냥 두렵거나 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러한 삶을,
나의 미래의 미래의 미래까지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