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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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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에 관한 새벽

by 김봉민 2017. 8. 13.

정직에 관한 새벽


<1>

나는 심오한 척 하는 것에 어느 정도 능통하여서 

지금 당장 여기에 기만적인 인간 유형을 성토한 

아리토소시우스의 신화를 거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준 마이클 O.바클리 닥터의 

그 유명한 책 <발칙한 인간, 솔직한 인간, 정직한 인간>의

157페이지를 인용할 수도 있다.

마이클 O.바클리 닥터는 말했다. 인간은 정직하면 손해만 본다고. 

그리고 나는 말한다. 바퀴벌레는 쓰레기봉투 인근을 좋아하고, 


위에 내가 쓴 것은 다 쓰레기봉투 같은 구라덩어리라고.



<2>

2년 전 제주도에서 나는 

반쯤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올레길을 걷고 있었다 

마라도로 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고, 

대장금을 찍었다는 곳이었으며, 

스타벅스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곳은 당연히


마라도선착장


이 아니었을까, 라고 

그때 반쯤 죽었다가 가까스로 눈을 떴던 

사람이 기억해낸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우산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없는 멜로디였으나, 보나마나 

어느 노래를 조금만 바꿔 흉내를 낸 게 

틀림없겠지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업혔던 건지, 

죽어가던 사람이 업혔던 건지, 가물가물하다, 

라고 쓰는 건 일종의 기만이다

둘 다 나였다

이런 식으로 쓰는 건 너무 

멋부리려는 작태에서 비롯되는 거다 

자, 보자, 얼마나 별로인가


멋은 힘주어 부릴 수록 구리다고



<3>

나는 지금 몹시 졸리다

자고 싶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예상보다 문제가 많다

게다가 지금 쓰고 있는 이건, 

너무도 구태의연해서 지워버리고 싶다 

이러니 잠이 더 쏟아진다

그러나 지우지 않을 거다

구리면 구린 대로, 구라면 구라인 대로 

쓰고, 

쓴 다음 욕이라도 먹는 게 낫다 

잠을 자고 싶다

그러나 참는다


나는 어디 한 번 끝까지 써보고 싶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만,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는 반 송장이 될 순 없다


<4> 

바퀴벌레가 쓰레기봉투 인근은 기웃거리듯이, 

마라도 선착장에 스타벅스가 있다가 사라질 수도 있듯이, 

아무런 신화에 근거하지 않고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듯이, 

혹은 그게 이것이고 이게 그거일 수 있듯이

나는 아무리 다시 구타를 당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반쯤 죽어가는 행색으로 졸음을 핑계로 제시하며,  

지금 써야 할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자기 기만의 역사를 중단해야 되겠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안달 난 발칙한 새벽, 

이쯤이면 선방은 아니더라도, 솔직히, 

후퇴 당하진 않았다

너그럽게 멋 부리지 말고, 이제는 잠을 

자랑스럽게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