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나 김봉민
어제 아빠랑 엄마랑 여자친구랑,
엄마는 내가 진작에 '입방정 좀 제발 떨지 마'라는
우려를 표명했으나, 보란듯이 어기며
왜 이렇게 늙은 애를 만나니?
라는 질문을 천진난만하게 여자친구에 던졌다.
오리고기를 먹을 땐 막상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제 와 다시 되짚어보니,
내가 이제 서른 넷이다.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더라도,
이런 데다가 쓸 땐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쓰는 것이
권장되는 나이다. 엄마한텐 입방정, 같은
어휘는 쓰면 안 될 연령이다.
아빠랑 엄마랑 여자친구랑 넷이 밥을, 아니 오리고기를 먹었으면
계산은 내가 좀 하는 게 합당한 시기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반박 사항은
엄마 말에 모든 게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늙은 애.
늙었으나 애다. 이건 또 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표현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56년생인 엄마는 자기 아들과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자기 아들이 아닌 자기 여자친구의 걱정이 담긴
대사를 남긴 거겠지. 아빠는 또 어떤가.
3년 있으면 칠순인 아빠는 몇 년 전, 나를 숨도 못 쉴 정도로
탄압했으나, 이제는 뭐라도 해주려 애를 쓴다.
이를테면 내 작업실에 에어콘을 놔주겠다는 발언은
정말이지 3년 전, 내 허접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상상력의 예측 범위에 있지를 않았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회까닥, 아이처럼 변할 수가 있나.
그리고 여자친구는 또 어떠한가. 오리고기를 먹은 후,
엄마 아빠 집에 갔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엄마가
수학 문제 푸는 법을 물어보자, 차근차근 선생님처럼 알려줬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엄마는 분명히 여자친구를
사설 선생님으로 인지하고, 문제 푸는 법 좀 알려달라고
왕왕 요구하겠지. 여자친구는 어제처럼, 의젓하게,
그때도 문제 푸는 법을 엄마에게 알려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친구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 단 둘이 있을 땐,
내 엄마랑 아빠랑 같이 밥 먹는 게
몹시도 떨린다고 했으나, 막상 같이 먹을 땐 참으로 밥을 잘 먹었다.
물론 우리가 먹은 건 밥이 아니라 정확히는 오리고기였으나,
오리고기를 먹은 것을 두고도 우리는 밥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밥 먹은 걸 두고는 오리고기를 먹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오리고기를 먹은 걸 두고는 밥 먹었다고 할 수 있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늙은 애처럼 이 새벽에 생각해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밥이라 치환하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오리고기로 바꾼다면,
오리고기이든 밥이든, 오늘, 우리 넷은 아무튼 뭔가 먹기는 먹었다.
아직 아버지에게든 어머니에게든, 내 마음에 냉랭함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오리고기 이외에 그 무수히 많은 음식들이
결국엔 밥이 되듯이, 그래, 밥이 되듯이, 아빠, 엄마, 라고 쓸 수 있지만,
이번에는 굳이 힘주어 아버지와 어머니, 라고 쓰고, 나는 그들과
늙은 애처럼 계속 뭔가를 먹긴 먹으며,
그냥 밥 먹었다고 말할 것을 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늙은 애를 만나는지,
가끔 나도 알 수 없는 나의 여자친구 역시,
나와 계속 밥을 먹을 것이고, 어쩔 땐 내가 선생님처럼,
여자친구는 오늘 내게 가르쳐준 것처럼,
요약하자면 그래, 여자친구도 내게 선생님처럼,
서로에게 뭔가를 계속 가르쳐주면 좋겠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라면으로 치환해도 되겠다.
라면을 먹어도 우리가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처럼,
함께 마주 보며 라면을 먹어 해치운다면, 그조차도 사랑이라는 것을,
입방정 떨듯 감히 발설하겠다. 나는 이제 늙은 애이므로 그 이유를 안다.
뭔가 더 쓸 수 있겠지만, 나는 이제 늙었다. 졸리고도 남은 시간에 당도했다.
이젠 자야 마땅하겠다. 대신 애처럼 펑펑 자야지.
사랑하는 사람과는 늙어죽을 때까지 함께 마주보며,
같이 밥을 먹고 싶다는 나의 꿈이 이뤄지면 좋겠다. 늙은이도 아니고,
애도 아니고, 그저 건강한 청년으로서 이 꿈을 일평생에 걸쳐
현실화시키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어제 먹은 오리고기의 맛을 잊지 말자.
무엇보다 이제, 그만 쓰자. 그만 써도 되겠다.
김봉민의 가족과 밥 먹은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