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제자가 썼던 작문 3편을 가지고 왔다.
내 제자는 지금은 서울예대 극작과 다니고 있다. 24학번이다.
내가 제작한 아래 교본을 통해 튼실히 극작 이론과 실기 노하우를 익혔으며,
실제 실기 연습 작문도 엄청 많이 쓰게 한 결과의 결실이다.
그리고 아래 작문 3편 이외에도 대략 30개가 넘는 합격 수준의 작문을
자신만의 레퍼런스로 만들어 갖고 있었다.
그 작문들을 앞으로 차차 이 블로그에 올릴 터. 기대해도 좋다.
그리고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손흥민이 골 넣는 장면 많이 본다고 손흥민과 같은 축구력이 생기는 게 아니듯,
서울예대 극작과 합격자의 작문을 본다고 해서 동일한 수준의 작문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거다.
본 건 그냥 본 거다. 근육질 몸을 본다고 해서 내 몸이 근육질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매일 쇠질을 해야지..
연습해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연습해야 좋은 건지
아래 작문을 보며 참고만 해야 한다는 거다.
- 시제: 주인공은 꿈속의 꿈을 꾸고 있다. 주인공이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만드시오.
제목 : 과장 박정철
#2023년 9월 21일, 과장 박정철
새벽 1시, 자고 있는 아내와 딸이 깰지도 모르니 아주 조용히 선반에서 컵라면을 꺼낸다. 서버 구축, 리브랜딩 건에 관해 회의가 늦어져 저녁을 걸렀다. 배도 고프고, 잠은 쏟아진다. 내일은 현장에 나가봐야하니 최소 8시, 그럼 6시엔 일어나야 하고... 한 4시간 정도 잘 수 있겠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자본 적이 언젠지 까마득하다. 컵라면 뚜껑 위에 대충 놓인 젓가락처럼 모든 게 성의 없는 인생. 눈꺼풀이 1톤을 되는 것 같이 무겁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푸욱 잘 자고 싶다. 양치해야 되는데... 식탁 위에 엎드린 채 저절로 눈이 감긴다.
#2007년 4월 3일, 취준생 박정철
오늘로 나는 서른 번째 불합격을 완성했다. 02학번 수현이 형은 오늘 국민은행에 최종합격한 모양이다. 주위 선배, 친구, 동기들은 벌써 취직하여 2년차인 녀석도 있고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한 때 싸이월드는 친구 놈이 올린 엽기사진을 보며 깔깔대고, 쉽게 좋아요를 누르는 흔한 sns에 불과했으나 이젠 누가 어디에 또 합격했는지 확인하는 수단만이 되어버려 두려운 존재가 됐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면접예상문제를 해가 틀 때까지 달달 외웠다. 침대에 누워 편히 자는 것도 죄인 것만 같다. 환하게 켜진 노트북 앞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흘러나오는 눈물은 무시했다.
#2000년 10월 15일, 수험생 박정철
수능까지 D-45, 새벽 3시가 되었는데도 독서실 안은 환하다. 독서실에 갇힌 것 마냥 어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20분 전부터 집중력이 고갈된 상태. 함수가 그려져 있는 모눈종이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커피가 한두 방울 남은 종이컵만 잘근잘근 씹고 있다. 고3이 되고 부턴 쌍문동 애들과 놀 시간은커녕 잘 시간도 없다. 코피 흘려가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 날 내 모든 것을 걸기엔 여전히 두렵다. 그래도 다들 하는데, 나도 해야겠지. 근데 5분만 눈 좀 붙이고... 해야지. 이제 수학책은 내 방 베개보다도 푹신한 것 같다. 눈을 붙이니 20년, 30년 뒤 직장인이 되어 멋있게 살고 있을 내가 보인다.
#1990년 5월 7일, 초등학생 박정철
억울하다. 6시에 하는 슈퍼그랑죠도 못보고 학교 숙제를 하고 있다. 오늘 엄청 중요한 38화 하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잠을 자게 해주든가. 내일 학교에서 짝꿍 영식이의 숙제를 대충 뺏기면 되는데.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서 억지로, 억지로 하고 있다. 엄마가 내일 준비물을 빨리 말하라는데 기억이 안 난다구요. 수수깡이었는지, 점토였는지, 스케치북인지 알게 뭐람. 슬기로운 생활 교과서 56페이지 끄트머리에 낙서나 끄적이다가 자는 척을 했다. 그럼 아빠가 나를 안아서 방에 눕혀줄 거다. 근데 자는 척을 하면 이상하게 진짜로 잠이 온다... 잠이...
#그리고 다시 지금
이윽고 정철이 잠든 식탁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청년이 앉는다. 대각선 자리엔 책가방을 맨 한 남학생이 앉는다. 앞자리엔 키가 덜 자란 한 소년이 앉는다. 넷은 서로를 쳐다본다.
‘띠리리리링’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시간은 6시 4분. 네 명이 앉아있던 식탁 위엔 정철 혼자만이 다 불어터진 컵라면과 함께 남아있다. 눈곱을 떼어내고 넥타이를 고쳐 맨다. 눈물이 흐른다.
끝.
제법 잘 썼지.
아래 작문도 보자.
시제: 나는 자아가 있는 인공지능(A.I)이다. 나의 이름을 짓고, 나에게 닥칠 가장 행복한 일에 대해 스토리텔링 하라.
제목 : K와 k
2049년 3월 12일
오늘은 나의 탄생일이다. 주인님이 나의 탄생선물로 k를 만들어주셨다. k는 나를 보필해줄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친하게 지내라 하셨다. 정식 명칭은 신개념 멀티가정용로봇머신 제 2호 ‘k’. 내 이름도 대문자긴 하지만 K인데. 신이 난다. 사실 그동안 집안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었다. 역시 주인님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아시는 것 같다. 앞으로 k가 나를 많이 도와주면 좋겠다.
2049년 3월 28일
주인님이 내일 아침에 갈비찜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주인님은 가끔 보면 양심이 좀 없으신 것 같다. 지난달에 내가 갈비 양념 재우느라 배터리 고장 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면서. 하지만 뭐, 괜찮다. 이제 나에겐 k가 있으니. 지금 부엌에서 k가 갈비찜 양념을 만들고 있다. 그래도 아침엔 내가 밥도 하고, 국도 해야 한다. 주인님이 잠 들었을 때만 k를 마음대로 시킬 수 있다. 그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양념까지 내가 다 만들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2049년 4월 9일
주인님이 출장을 가셨다. 이틀 뒤에 오실 거라고 하셨다. 무려 이틀이나 자유시간이 생기다니. 나는 오늘 설거지, 빨래, 청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k에게 시키면 되니까. 그리고 k는 개발된 지 한 달도 채 안 돼서 나보다 집안일을 더 잘했다. 그릇엔 광이 나고, 옷을 새 옷으로 만들어 놓고, 집도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나는 주인님 방 침대에 누워 약 30년 전의 고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시청했다. 아주 재밌었다. 아, 그리고 k에게 주인님이 이틀 동안의 일을 물어볼 수도 있으니 이틀간의 기억을 삭제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k가 배터리를 들고 온 걸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2049년 4월 27일
오늘은 주인님 없이 k와 둘이 홈플러스에 갔다. 계란, 우유, 설탕 등등 떨어진 게 많다. 홈플러스에는 가정용로봇들을 많이 있었다. 그중 천호동에 새로 이사 왔다는 ‘빅셰’라는 로봇과 친해져 1층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아, 그래서 k가 홀로 장을 보았다. 한동안 당연했던 k의 존재가 새삼스레 고맙게 느껴졌다. k는 알아서 척척 장거리를 잘 담아왔다. 앞으로도 k와 둘만 장을 보러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2049년 5월 1일
내가 한동안 k를 너무 심하게 부려먹어서인지 k가 과부하에 걸려 고장이 났다. 어떡하면 좋지? 주인님이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서 고장 난 k를 발견하면 난 정말 혼날 지도 모른다. 지금껏 주인님이 안 보는 데서, 없는 데서 몰래 몰래 k를 부려왔기 때문에 주인님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 두렵다. 무섭다. 근데 앞으로 k 없이 나 혼자 어떻게 집안일을 하지...? 하... 큰일이다, 정말.
2049년 7월 13일
k의 수리가 끝났다. 그리고 오늘 주인님은 집에 k와 함께 S를 데려오셨다. S는 k를 보필해줄 가정용로봇이라고 하셨다. 그럼... 만약 S를 보필해줄 s, s를 보필해줄 Z, Z를 보필해줄... 가정용로봇이 계속, 계속 생겨나는 걸까? 아무튼 나는 정말 좋다. 이제 S까지 있으니 k를 주인님 앞에서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겠다. 오랜만에 두 건전지를 뻗고 푹 잘 것 같다.
끝.
서울예대 극작과 실기의 시제는 해당 년도에 가장 화제가 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뤄진 사례가 많았다.
고로, 나는 올해 수시와 정시에서 AI 관련한 시제가 나올 확률이 아주아주아주 높다고 예측하고 있다.
여러분도 꼭 AI 관련한 시제로 연습 작문을 써보길.
- 시제: 인간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주관적 관점에 의거하여 쓰시오.
제목 : 만약 당신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만약 당신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라 당신의 목표에 집중하라.
-알버트 아인슈타인
나를 매료했던 한 구절, 나는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다짐했다.
내 나이 15살 때 일이었다.
#1998년, 8월 21일
드디어 점심시간,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흰 쌀밥에 짭짤한 장조림, 분홍소시지, 밥밑엔 넓적한 프라이까지 숨겨져 있다. 오물오물 밥을 먹으며 머릿속으론 수학 공식을 외웠다. 오늘 야자 땐 수학의 정석을 복습할 생각이다. 엑스는이에이분의마이너스비플러스마이너스루트비제곱... “야, 김정철! 축구하게 운동장으로 나와!”
웃통을 까고 내 이름을 떠나가라 부르는 희동이 때문에 집중이 다 깨졌다. 축구... 나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도시락을 다 먹고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할 뿐. 19살 김정철에겐 첫 번째 목표가 생겼으니. 바로 꿈의 대학, 서울대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약 3개월. 축구는 확실한 사치였다.
#2004년, 4월 9일
내 두 번째 목표는 대우전자의 자회사인, 대우인터내셔널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밖이 어두워질수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더 밝게 빛났다. 내 앞에 앉은 03학번 영희는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영희와 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사과대라 오며가며 자주 마주쳤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영희의 모습은 여신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나는 취업에 바쁜 복학생이자 목표를 정하면 이루는 남자. 무엇보다 빨리 취직해서 돈도 벌고,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싶었다. 영희 생각, 취업 생각, 부모님 생각, 잡생각이 많아지니 절로 담배가 생각났다. 화장실에서 한 개비를 피우고 돌아왔다.
‘같이 벚꽃 보러 가요. 016-2831-8969, 김영희’
내 자리 위에 쪽지와 함께 따뜻한 조지아 캔 커피가 놓여있었다. 영희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고뇌하다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면 안 돼. 벚꽃은 사치였다.
#2015년, 2월 11일
5월에 차장진급이 있다. 나도 이제 과장만 5년차, 차장 정도는 달 때가 됐다. 나는 승진을 위해 해양플랫폼 기본설계 EPCIC 공사 관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프로젝트를 리드하여 성공적으로 끝마치기만 한다면 개발운영팀 윤 과장과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에 김 부장님을 따라 골프 치러 강원도도 가고, 이번 주 회식도 풀로 잡아야 할 것 같다. 세 번째 목표가 입력되자 생각만으로도 바빠졌다. 그때, ‘띠링-’
‘아빠. 다음 주 토요이레 동뭉원 가요’
아들래미가 아내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귀여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근데 다음 주 토요일이면... 강원도에 가야하는데. 뭐. 동물원은 다음에 가면 되지. 동물원은 좀 사치... 아니겠어?
#현재
폭우가 내리는 어느 울적한 날이었다. 퇴근을 하고 회사 근처 막걸리집에서 막걸리 한 병, 파전을 시켜놓고 홀로 앉아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목표를 이루려 아등바등 살아왔다. 근데 왜일까. 목표를 모두 이뤄냈는데. 서울대 출신, 연봉 1억의 무역회사 차장인 난데, 왜 전혀 행복하지 않은 걸까. 텅 비어있는 앞자리가 미치도록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 많은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기, 회사 동료 중 불러낼 사람 한 명 없는 이 순간, 나는 반성을 한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나 매 순간 많은 것을 놓쳤구나.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을까 두려웠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아들. 내일 같이 동물원 갈까?
아들의 답. "아니요. 싫어요."
하늘을 보며 생각해본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만약 당신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라 당신의 목표에 집중하라고.
하지만 아닌 거 같다. 인간이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살아가는 것.
만약 내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한다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작은 행복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앞으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내 나이 42살 때 일이었다.
끝.
자, 여기까지다.
작문 3편 읽는 것도 쉬운 게 아니지. 근데 3편 쓰는 건 더더더더더 쉬운 게 아니란 걸
작문 써보겠다고 몇 번이라도 폼 잡아본 서울예대 극작과 입시생들은 충분히 납득할 거다.
글쓰기는 힘든 거다. 그래서 매일 연습을 해야 하는 거다.
변명은 필요가 없다. 벌써 이제 7월이다. 수시가 얼마 안 남았다.
내 경험상, 연초엔 근면성실하게 글쓰기에 매진하자고 다짐했으나
정작 하루하루를 유튜브와 인스타 숏츠 보며 허송세월 했을 극작과 입시생들이
아주 많을 거다. 거듭 말하지만 변명은 필요없다. 입시에선 남 탓도 무의미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본인이 해야 할 것을 묵묵히 하는 사람에게 합격의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서울예대 극작과 24학번 합격자 작문 3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