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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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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민 2023. 12. 25.

 

 

<사랑>
아들들은 아버지를 미워한다
아버지가 아들들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자,
그들을 더욱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겐 아들들에게 욕하고 때리고 화낼 수 있는
특권이 있으나
아들들은 아버지를 미워하면
윤리에 벗어난 폐륜아가 되어 버린다
폐륜아를 아들로 키운 아버지는 부끄럽다
아들들은 아들들을 폐륜아로 키운 아버지가 부끄럽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미워한다
아들들이 아버지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엄마들은 몇 해 전, 묵묵히 죽었다
 아버지와 아들들도 계속 그렇게 묵묵히 사랑하며 죽어갔다


<중랑천의 밤>

지루하기만 했던 우리의 청춘이
사실은 이미 오래 전,
조루로 끝났던 건 아니었을까.
좀처럼 마음이 발기하지 않는 밤,
부리가 삐뚤어진 두 마리가
중랑천 살찐 옆구리에 둥지를 튼다.

저만치,왕년엔 똥물이었던 것도 모르고
목이 긴 날개 달린 새가 뾰족한 부리로 수면을 찢고
중랑천을 제 안에 훔친다. 질세라,
덜 늙은 소년이 더 늙은 소년의 방해를 뚫고
유일하게 온전히 자기 몫인
깡마른 고추를 잡고
한 번 즈음 중랑천의 똥물이었을
방광의 소주를 지그재그 방생한다

평소보다 일부러 많이 산 소주는 모자라고
평소보다 일부러 적게 산 안주는 남아도는 현실의 습관적 부조리에
정수리에서 김이 났던 것이다

두 단백질 덩어리의 정수리 위에
언젠가 한 번 즈음 중랑천이었을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면,
식지는 않고 아예 녹아내릴 지경이 되고,

계속 해장국집의 뚝배기 안에서,
카페의 머그잔 안에서, 목욕탕의 냉온탕에서,
세숫대야 안에서, 콜라 페트병 안에서, 수족관 안에서,
뒷골목의 움푹 파인 곳 안에서,

몇 번 즈음 누군가의 비루였을
중랑천은 꾸준히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악동>
자해. 자위.
소년의 취미는 자연스레 형성됐다
반성문은 열 두번 하고도 한 번 더 제출했지만,
내용을 기억해줄 이 없어서 대충 썼다
어른들은 저마다 교육자였고,
어린 것은 욕할 줄 아는 혀로
밥맛을 느끼며 거꾸로 자랐다
그 사이 악동은 열 두번 하고도 두 번 더
자살의 의미를 탐험했다.
민주주의의 자유랄까,
자지러지도록 엉엉 울다가
미안해서 사정만 할뿐.
누구도 자비는 없었다



<양>
훌러덩 훌러덩 나를 벗겨라

지이이잉
잉이이지

뭔가 거꾸로 되어 가는 기분

발칙하게 내가 깎이는 건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건지

뭔가 제대로 이상해진 기분

면도의 날은 늑대처럼 지난 시간의 애정을,
기다림의 가치를, 그때의 그렇고 그런 풋풋함을
지이이잉, 잉이이지, 절단

메에

그리고 한 번 더 메에
진동하는 목젓으로, 메에
다리가 떨려
떨리는 건 양 다리인가, 땅바닥인가
생각키도 전에 그저 울어 제낄 뿐

다 끝나고, 없는 일인 듯 걷고, 밥을 먹으면,
볼 수 없는 모공에서 눈에 보이는 따듯하고 하얀 것이
그새 자라고 있었다


<공사 현장 당직 노동자>
현장 자재들, 중장비들 어느 누가 몰래 빌려라도 갈까 봐
기꺼이 자기 인생의 하룻밤을 바치는 사람들
아직은 지어지지 않은, 상상 속의 건물을 위해
무형의 1층에서 완공을 기다리는 사람들
너무 춥거나 너무 무덥고,
판자촌 같은 가건물에서
지금 당장 덜 춥거나 덜 더움을 안락하게 여기려는 남자들
앉아서 따로 뭔가 공사하다가 멈추는 소리를 듣는다


<잊지 않는 힘>

울고 싶었지만 참았고 
참고 싶었지만 웃었던 날들 위주로 구성된 기억의 무게가 곧
내 세계의 무게라서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을 이젠
내가 사랑하지는 않고,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를 
나는 사랑하게 될 텐데,
맥주를 마시며 굳이 추억하고, 굳이 상상이나 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마침표 찍는 것엔 강박을 못 느끼나, 
스스로를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다가,
나, 사랑, 그녀, 맥주, 추억, 상상, 마침표, 강박, 의아
이런 키워드들을 나열하고보니, 꽤 
훌륭한 구성인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노골적으로 찍은 마침표가 내일이면 지상 분해된다는 건
경험 상 추측 가능하고, 쉼표가 많아서 걱정이다, 이게 다,
쉬지 않고  사랑했기 때문인 것 같아, 이건 경험 상
오래된 사랑의 결과물이야
이젠 의도적으로 마침표를 안 찍는 여유랄까, 
그런 여흥 속에서 이 결과를 여하간 받아드린다. 나쁘지 않은 구성의 세계였다.
더 무거워져도 괜찮겠지 싶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도. 내가 사랑할 그녀도. 



<혁명>
똥 쌀 이유가 사라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언제라도 변기에 의탁하기 마련
밥은 먹고 다닌다
날개 달린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여도, 난다는 그 모습만으로는
까마귀와 다를 게 뭔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출현할 때까지는
일단 사람들에겐 어머니가 있고 볼 일

바퀴벌레의 똥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만, 
이제는 아마도 그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혁명이라는 것도, 
혁명이 아예 불필요한 시점이 올 때까지는
안전하고 안전한 변기 안, 뚜껑도 잘 닫힌 그 안에,
의젓하게 숨어 있어라
너의 울음소리는 하얗게 내 귓구멍에 잘 있다
어머니들은 하늘을 날고야 만다


<혁명가의 청소년기>
어른들은 우리의 미래에 
재수없는 점괘를 들이밀었고
나는 반성문을 찢어버렸다 
포르노를 틀기 전,
윈도우는 바이러스에 걸렸는데도
줄기차게 새로운 시작을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속지 않은 너는
혁명적인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앞으로에 대한
사사로운 흥정을 관두자는 게
골자였는데 워낙에 악필이라
읽기 벅찼다
잠자리는 흔해도 
나비는 볼 수 없는
면목동 밤하늘, 저건 별인가 
인공위성인가
나는 새로운 운세를 적어보았으나
곧 찢었다 윈도우는 마지막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화면이 굳었다
포르노를 볼 수 없다는 좌절과
포르노를 만들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인공위성도, 별도 아닌 것이
반짝이며 파르르 사라졌다
하여 나는 꾸준히, 점점 크게 혁명을 읊조렸다


<거역할 수 없는 슬픔>

천 원의 가치는 천 원이 없을 때
진정 빛나고
그 때문에 4시간을 걸었을 때
발바닥을 통해 온몸에 각인된다. 

종로 3가역엔
삼삼오오 노인들이 모여
세계의 결말을 집대성한다. 
명동의 한 종교인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의 도래를
선포했고 아이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투옥됐다. 

건강한 강아지는 똥도 잘 눈다. 
꽉 막힌 구멍은 스스로는 뚫리지 않고
똥은 썩고 싶었으나 
추위를 못 견디고 냉동, 그 겨울엔
아무것도 이루질 못 했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
진정 작아지고
그 때문에 1초도 괴롭지 않았을 때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은
뻔뻔하게 통용되었다. 

거리 위에 추위가 굴러 다니며
새로운 유형의 천국을 자아낸다. 
그 모습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에 뿌리내렸다. 

툭. 
고약한 열매가 오늘도 떨어진다. 


<일용할 메시지>
힘들고 외로울 땐 하늘을 봐. 
매연 때문에 별도 안 보일 거야. 
그럼 정말 느끼게 되겠지. 
세상엔 너 혼자라는 걸.
친구를 찾아도 소용없어. 
그는 지금 잠들어 있어. 
공연한 전화로 깨우지는 마. 
피곤한 친구는 자고 싶어 해. 
너까지 괜히 괴롭힐 필요없다구. 

그럼 어떡해야 할까. 
뭘 어떡해, 어떡하긴. 
그냥 너도 잠이나 자. 
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물론 아니야. 
하지만 자고 나면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보단 
조금은 덜 속상할 거야. 
양을 세 봐.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이러다 전 세계 모든 양을 셀 거 같다고?

네가 왜 이렇게 거대한 양 목장을 
짓고 있는 줄 아니. 

네가 누군가를 외롭게 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도 외로운 거야. 
별도 보다 말았겠지. 
잘 보면 이 넓은 하늘에 하나쯤은 빛난다고. 
그게 설령 인공위성이어도 
인공위성 역시 외로움을 알아. 
네가 봐준 걸 고마워한다고. 

그러니 내일부턴 
네가 외롭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보듬어줘. 

그럼 이렇게 외롭고 힘들 때
저절로 전화는 걸려 와. 
피곤한 친구도 자기 전에
네 걱정에 문자는 남기고 잤을 거라고. 

외로움을 이길 수는 없어. 
그건 22세기가 되어도 불가능 해. 
그래도 함께 한다면 줄일 순 있어.  
내가 이렇게 날 위해 
너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