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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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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넷 OST 들으며.

by 김봉민 2023. 10. 27.

 

가끔은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건지 생각 안 날 때가 있다. 

 

생각이 안 난다. 

 

내가 오늘 뭐하다가 이 시간을 맞이한 건지 기억을 더듬어볼 때도 있다. 

 

오늘 일인데도 구체적으로 안 떠오를 때도 있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온 걸까. 

 

케케묵은 헛소리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없지는 않다. 있다. 근데 있다와 없지 않은 것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다. 

 

갭의 차이랄까. 

 

나는 숨을 쉬려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은 저절로 숨을 쉬고 있는데, 언젠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숨을 못 쉬는 그런 시간이 찾아올 거다. 

 

그 앞에서 나는 얼마나 내 이 망각적 하루들에 미안해질 것인지. 

 

이런 노래를 들으면 결국 이런 걸 쓰게 되어 있는 법이지. 

 

멈출 수 없는 걸 멈추려 해본 적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사는 게 즐겁길 바란다면 즐거움의 수위를 낮춰야 되겠지.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오늘 내가 뭐뭐를 했는지 다시금 유추해보려 해야겠지.

 

이번 주 월요일에 술 마시고 오늘까지 술 안 마신 건 분명하다. 

 

다 멈춰졌으면 했다. 다 끝났으면 했다. 왜 자꾸 키가 작아지는 기분으로 연명하는 거 같은지 억울하기도 했다. 

 

배부른 늬 새끼들의 면상을 나의 둔탁한 팔꿈치로 내려 찍고 싶은 적이 없지 않았다. 

 

다 끝나길 바라는 마음의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그들. 

 

나는 억울하다. 뼛속까지 억울하다.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결국에 귀결되는 건 화다. 

 

매일 지면서 사는 기분이다. 

 

나만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을 품어봤고, 그걸 계속 잊으려 했던 것이다.

 

화. 잊으려는 마음. 즐거움. 기억하고 싶은 마음. 

 

아무도 응답하지 않더라도 계속 비명 같은 구호 신호를 보내는 자의 마음. 

 

세상이 얼마나 거지발싸개의 형식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면 굳이 뉴스 씩이나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울을 보거나 셀카를 찍으면 그 안에 이미 그 공고한 포맷이 자아낸 최악의 콘텐츠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너를 생각했다. 너는 나를 생각하지 않았지. 그게 결정적인 거였어. 

 

고생했다는 말을 이제는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제발 여기까지만 해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겁니다. 

 

마구 쏟아지는 이 못생긴 말의 향연은 가히 정화조를 방불케 한다. 

 

밉지 않아. 대신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건, 아직은 약간 관심이 있다는 거. 

 

언제쯤 언급조차 안 하고 나는 너를 대할 수가 있을까. 

 

육만가지 일들이 자아내고, 그것들이 농축된 게 지금 나의 모습이다. 

 

나는 네가 싫어. 싫어하는 게 좋아하는 것보다 나쁜 거냐? 나쁜 걸 싫어하는 건데. 

 

꽉 막힌 도덕주의자인 주제에 자유 분방하며 언젠가 기필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늬가 나는 싫다. 너는 너 자신조차 못 뛰어넘고 있으면서 어디 건방지게 남의 인생에 침범하여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며 너의 우월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을 나는 이제 애써 지우지 않겠다. 아주 처절하게 과녁 삼아 총알을 발사하겠다. 

 

분노는 인내하여 소멸되길 기다리는 게 상책인 게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분노는 안전하게 폭발시켜 실질적이고 물리적으로 아무도 크게는 안 다치게 하는 게 상책이다. 이게 이미 여기 또아리를 튼 이상, 나는 이걸 이제 폭발시켜야 하겠다. 

 

그러므로 글을 폭탄과 같다. 총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