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에곤 쉴레
<슬픈 피동체 표현>
올해 들어 서른, 하고도 셋. 여기서 하나나 둘을 빼기 전부터 나는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인이 되면 아무튼 뭔가 달라질 테니 이상하고도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반드시 노인이 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추하지 않은 노인이 되자고 생각했다. 노인이 되면, 노인일 때만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거고,
내가 추한 노인이 되지 않는다면 추하지 않은 글을 쓰는 노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후면 빼도 박도 못하고 생물학적으론 노인의 반열에 강제 입성하게 될 텐데,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이 꿈을 밤과 낮으로 곱씹자고 생각했다.
내 꿈은 내 안에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내 바깥에서 이뤄지니 윤씨 성을 가졌던 한 청년이 별을 헤는 맘을 잘 패러디 해 세상을 잘 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잎새에 이는 미풍에도 나는 부끄워지기 일쑤.
셋, 둘, 하나, 빵.
나이를 거꾸로 먹어 점이 되어 사라지고 싶을 만큼 나는 꼴 사나웠던 적이 많았다.
그걸 지금 여기에 빼곡히, 아주 구체적으로 적고 싶지만,
누군가 그걸 읽는다면 나를 아주 형편 없는 놈으로 볼까 봐 걱정스럽다. 솔직해지기 싫다.
그런 것들이 이제는 사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세상을 잘 보자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이제는 노안이 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게 침침하게 보이고 흐물흐물하게만 보인다.
나의 꿈은 창공에서의 비행을 멈추고 천장에 박제 되어가고,
그 범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하나 둘 셋, 빠짐 없이 시간은 앞으로 가고, 별 헤는 맘도 침침하고 흐물흐물해진 것 같다.
나는 노망난 건 아닐 텐데, 나이를 먹는다는 게 조금씩 키가 자라며
내가 줄곧 올려다봤던 꿈의 천장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천장과 내 정수리와의 간격이 좁혀지는 과정이 아니라,
조금씩 나는 난장이가 되어가고, 내 꿈의 높이도 덩달아 낮아지며 이 천장이 내 정수리를 푸쉬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낮기만 한 천장을 못 이기고 꼽추와 같은 형상으로 구부정하게 있는데,
내가 난장이가 된 것도 모르고,
천장이 낮아진 것도 모르고, 그냥 내가 이만큼 자란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난장이에 꼽추. 거기에 조로도 시작된 걸까. 허나,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
세상이 점점 지옥으로 보이더라도 이 지옥이 멸망하진 않길 바라는 건 이 지옥에 악마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난장이는 작은 공을 쏘아올린다.
꼽추 콰지모도에겐 에스메랄다가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누군가의 심리적 시간은 거꾸로 가기도 한다.
나는 치매는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피동표현을 여전히 혐오할 줄 안다.
나는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가끔은 일찍 치매에 걸려 다 잊고 싶다고도 생각하지만,
나는 서른 하고도 셋. 지금 이때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을 써야 되겠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천장은 압박을 가한다. 나는 어쩌면 정말 난장이에 곱추.
그리고 조로일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저 천장에 짜부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롭다. 사실 이제 생각만 하는 건 지겹다.
하나, 둘,
거인 같은 상상력으로 다 들어올리고,
셋, 넷.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김봉민의 작가는 슬픈 뭐뭐 #1. 슬픈 피동체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