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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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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기억력의 왕

by 김봉민 2016. 1. 14.


마크 로스코 작품마크 로스코 작품



2015년 4월 14일

나는 신주리라는 연기 참 못 하는 여배우를 20세기에 꽤나 열렬히

좋아라 했었는데, 그녀는 지금 뭘할까. 

소속사 사장이랑 결혼했다는데 지금도 연기는 못 하겠지. 

또 21세기인 지금, 많이 늙었을 거야.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늙었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 형님의 근황은 또 어떻고. 

통 알 방법이 없다. 형님은 이제 보란듯이 어엿한 할아버지의 형상을 하고

유럽 어딘가에 계시겠지. 그런데 신작은 왜 안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왜 내가 갖고 있던 그의 모든 책을 잃어버린 걸까. 


문득 나와 한때는 정말 친했던 극작과 동기 최영혜의 현재 삶도 궁금해진다. 

아직 창동 근처에 사나. 교대엔 결국 못 들어간 것일까. 

술은 아직도 무진 잘 마시나. 영은이 누나랑은 이따금 보는 것 같던데, 

왜 연락을 끊을 것일까. 못난 놈. 

서울산업대 사람들의 안부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현우형, 혜진누나, 주희누나, 기선누나, 

아, 그리고 이름을 까먹은 수많은 누나들, 그중에서도 특히 귀여웠던

조형대 01학번 키작은 누나와 산보형, 승용이형, 동윤이형 등등. 

죽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내 평생, 이름과 얼굴을 알고, 함께 얘기 나눴던 사람들이 

족히 수 천명은 되고도 남을 텐데, 다 어디 갔나 모르겠다. 

이런 늙은이스러운 생각을 하면 사는 게 꽤 묵직해지고, 아련해진다. 

무언가를 잊는 힘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동의한다. 

너무 많은 걸 기억하며 사는 건 괴로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잊지 않는 힘은 이렇게 사라졌던 인간들을, 

적어도 내 안에선 부활시킨다. 

그들은 다시 살아났다. 그 눈빛, 그 목소리, 그 기운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래서 말인데, 


재생.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던 인생의 순간과 그 속의 등장인물들이 

다시 살아났다. 내 인생이 더욱 풍부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잊혀져간 내 주변의 사람들을

꾸준히 상상해야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한 글을 부단히 써내야지. 

신주리와 쥐스킨트 형님과 최영혜와 서울산업대 사람들과, 

그 이상의 사람들과 그 이상의 이상의 사람들을 상상하는 걸 멈추지 말아야지. 

하나도 잊지 않아야지.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기억력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