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가진 게 많아서 눈물 날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비극은 부자들의 예술.
희극은 가진 게 없어서 웃음을 잊어버린 자들을 위한 것.
희극은 빈자들의 예술.
그럴 듯해 보이지만,
아니다.
비극은 그런 게 아니다.
비극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운명적 사건으로 인해 시련을 경험하지만
그 고된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그것을 위한 행동을 감행하여
그가 미처 몰랐던 진실을 비로소 깨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가상의 리얼한 현실을, 가상 아닌 리얼한 현실에 사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각자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은 슬픔과 비운, 고통에 매몰되어 있는 장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이면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 혹은 발명해내려는 장르인 것이다.
고로 비극은 숭고하다. 또는 장엄하다. 숭고하고 장엄한 순간을 목도하는
우리의 표정을 거울을 통해 보자. 우아한 모습이 그 안에 있을 거다.
마치 훤칠한 모델의 멋진 포즈처럼. 그러니 이걸 퉁쳐서 우아미라 하자.
비극은 우아미로 귀결된다.
희극? 희극도 그런 게 아니다.
희극은 기쁘고 즐거운 희망의 찬가를 울부짓는 것이 아니다.
희극은 비극의 반대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비극성의 토대 위에 건설된 것이 희극이다.
중요한 건 비극이 아니라 비극성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그 건설의 재료는 놀래키기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전혀 개입 안 될 요소가
자꾸만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보는 이를 놀래킨다.
그럴 때 웃음이란 것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보는 이의 집중도를 올려놓는다.
자꾸 보게 만든다. 그런데 그 놀람, 의외성의 성분을 보면
슬픔과 비운,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동자? 못 생겼다. 괴롭다. 근데 잘 생겼다고 주장한다. 웃음이 난다.
영화 스쿨 오브 락. 만년 무명인 비운의 뮤지션이
생활고라는 슬픔으로 인해 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다.
이 고통스러운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웃는다.
김병만의 달인 코너. 일평생,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 한 분야에
모든 걸 건 캐릭터에 관한 것이다.
영화 트루먼쇼? 태어날 때부터 철저히 통제된 가상의 현실에 갇혀 사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덤앤더머. 태생적 바보들의 이야기다.
아무도 태생적으로 바보로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철저히 비극성을 띠고 있다.
희극은 비극성을 전제로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희극은 비극의 반대가 아니라,
비극의 사촌이다. 비극도 희극의 사촌이다. 다만 희극은 놀래키기가 추가되어서
우아미로 귀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놀랐을 때의 표정을 거울을 통해 본다고 생각하자.
일그러져 있을 거다. 구겨져 있을 거다. 아무튼 웃길 거다.
그 우아한 김연아가 트러플악셀을 할 때의 순간,
사진을 찍어놓어서 보면 그 사진엔 김연아의
일그러진 표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희극엔 그래서 골계미로 귀결된다.
그리고 내가 비극과 희극에 대해서 이렇게 써재껴보는 이유는 하나다.
나는 비극과 희극이 사촌지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거의 항상 대부분 무언가를 써야 한다면 희비극의 양상을 띠는 이야기를 쓰려고 발악하거덩.
나는 근친 교배를 꿈꾼다. 우아미와 골계미가 뒤섞인 된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것은 한국 블록버스터가 허구한 날 꿈꾸는 초반부는 코미디, 후반부는 신파,
줄여서 '초코후신 잡극'과 같은 것이 아니다.
아예 한 몸뚱아리가 된 것을 써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알고 싶다. 비극과 희극의 게놈지도를.
하여 나는 이런 걸 굳이 써야 했다.
나 아니면 누구도 낳을 수 없는 나의 아들딸에게 담겨 있을 나의 유전자 지도처럼,
나 아니면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나의 이야기의 게놈지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근데 아마 내가 틀렸을 거 같다.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