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작문부터 보자.
2022년 서울예대 극작과 정시에 최종 합격한 내 제자가
나에게 수업을 받으며 썼던 연습 작문이다.
속독 금지다.
천천히, 정독해야만 서울예대 극작과 합격을 바라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다.
이 작문이 내 제자의 최고치가 아니다.
이게 평균치다. 기복이 심하다는 건 입시 준비에 있어서 극악의 상황인 것이다.
실력의 평균이 합격권에 이미 근접해 있어야 리스크가 준다.
합격 확률도 자연스럽게 는다. 그럼 실력의 평균은 언제 오르는 것일까?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부단히 연습하고, 쓰고, 첨삭 받는 것에서 기인한다.
주간 이벤트 식으로 연습 작문만 쓰는 사람과
매일매일 쓰는 사람이 있다. 누구의 실력이 더 높아질까?
그게 1개월, 2개월, 나중에 6개월이 지난 후엔 얼마나 큰 차이를
발생시킬까? 게다가 자기가 쓴 작문이 제대로 쓴 것인지,
부족한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것도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
내가 평일, 매일 과제를 시키는 이유다.
내가 매일 그 과제에 첨삭을 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 내 제자의 서울예대 극작과 합격 수기가 그 사실을 뒷받침 한다.
나는 안다. 나 역시 극작과를 졸업했기에 구체적으로 안다.
예대 극작과 입시를 준비할 땐 자신감이 없기 마련이다.
내가 과연 붙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걸 명심하라. 자신감의 근거는 나 자신이
매일 연습하고, 단련하고, 어렵더라도 다시 해보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여, 역으로 자신감이 없다는 건
매일 연습하지 않고, 글쓰지 않는 일상에 내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죽도록 연습해본 적이 있는가?
하루에 채 1시간도 글쓰기 연습을 하지 않는 주제에
서울예대 극작과 입학이라는 꿈을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결례일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자신감을 드높이기 위해선
몸으로 증명해야 한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 막막함마저 하나의 좋은
경험으로 여기며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날도, 그리고 다음 달에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그러나 부단한 연습과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적확한 첨삭이다.
아무 지침도 없이 홀로 연습하는 것은 외로운 건 둘째 치고,
잘못된 방법으로 스스로를 단련하여 오히려 실력 증강이 아니라
자기 실력을 골병 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글들도 읽어보자. 2편이다. 첨삭이 중요한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볼드 및 밑줄 처리 된 것이 나의 첨삭 내용이다.
1) 로그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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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수식어: 성공한 코미디언
욕망: 가족을 웃기고 싶다.
방해물(사람, 세력): 엄마, 동생, 아빠
2) 개요 분석-
-서 : 대중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으로 성공했지만 정작 가족을 웃긴 적은 없음. 가족을 웃기기로 마음 먹음
- 본 1 : 엄마를 웃기기 위해 엄마 직장의 상사를 뒷담화 함.
- 본 2 : 동생을 웃기기 위해 나 스스로를 무너트림. 슬랩스틱을 함.
- 본 3 : 아버지를 웃기려 했는데 이미 웃고 있음. 가족들이 웃는 것을 보고 웃는 아빠
- 결 : 결국 모든 가족을 웃겼다. 하지만 난 울었다. 엄마, 동생, 아빠를 웃기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가족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 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 이제는 대중들 보다 가족을 웃기기 위해 살아보려고 한다.
차라리 주인공이
최악의 코미디언. 코미디 관둘까 고민 중.
마지막으로 가족들이라도 웃겨보고 관두자로 시작해서
결에서 이렇게 되는 게 어떨까?
성공한 사람 -> 본 -> 더 성공하자!
이건 별로다.
좆된 사람. 죽고 싶다. -> 본 -> 살자
이게 드라마틱하다. 이걸 충실히 반영한 게 유서첨삭류 작문들이다.
결의 상태와 정반대인 걸 서에 설정하면
보다 더 드라마틱해지는 법이다.
3) 소요 시간: 1시간
[본문]
2018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코미디언.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이 한 말처럼, 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었다. 항상 누군가를 웃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였지만 정작 우리 가족들은 웃음에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근엄한 아버지 때문일까, 우리 집은 항상 조용했다. 웃지 않는 가족만큼 비극이 또 어딨겠는가. 그래서, 난 이제 대중들 말고 우리 가족, 동생, 엄마, 아빠를 웃겨보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엄마는 과연 언제 웃을까. 난 대형 마트 캐셔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집으로 오는 내내 마트의 점장을 욕했다. 가뜩이나 사람이 많아 바글바글한대 괜히 와서 말투가 이상하다느니, 자세가 불량하다느니 시비를 건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코미디 극단 막내로 들어갔을 때 항상 나에게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극단 선배들이 미웠던 것 같다. 난 바로, 꼬스트코 대형 마트 점장을 인터넷에 검색해 집에서 엄마와 함께 열심히 점장뒷담화를 했다.
“엄마, 이 사람 왠지 관상이 사기꾼 관상이야”
“엄마, 이 사람 목소리가 왜 이리 모기 같애?”
“엄마, 이 사람 보나 마나 여자한테 인기 없을 거야”
엄마는 오랜만에 자신의 뒷담화에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생겨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웃었다.
두 번째는 남동생이었다. 언제나 유머와는 관련이 없이 아빠를 닮아 진지하기만 한 남동생. 이 녀석은 언제 웃을까. 엄마처럼 같이 얘기를 해보면 알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워낙에 나랑 사이가 안 좋은 녀석이라 그런지 몇 번을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좀 맛있는 걸 들고 가면 괜찮을까 싶어 쥬스를 들고 동생 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동생이 웃었다. “푸하하하!”
동생에게는 나의 몰락이 가장 웃겼던 것이다. 언제나 장남이라고 대우받은 나에 비해 차남이라고 대접받지 못했던 동생은 나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크게 웃었다. 그때부터 동생 앞에서는 슬랩스틱을 하기 시작했다. 괜히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쇼파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동생은 웃었으니까. 드디어 동생마저 웃겼다. 이젠 마지막, 근엄한 아빠였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웃는 모습은 보여준 적 없었던 아빠. 아빠를 웃기는 것은 내 소원이기도 했다. 아빠는 과연 언제웃을까.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엄마와 같이 아빠와 이야기를 해보면서 아빠의 웃음을 이끌어 내보려고 다가간 아빠는, 웃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근엄하셨던 아빠가 웃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어 아빠에게 묻자 아빠는 말했다. “가족들이 웃는 걸 보니 너무 좋구나”
아빠가 웃을 때는 가족들이 웃을 때였다. 엄마를 점장 뒷담화로 웃기고, 남동생을 슬랩스틱으로 웃기면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웃음을 보고 웃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가족’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
울컥.
하지만 내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가족들은 웃었지만 나는 슬펐다. 대중들을 웃기기 위해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 웃음 포인트, 현 청춘의 힘든 점들을 찾아보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였지만 정작 내 가족들에게는 그러지 못했었다. 오늘 전까지는 엄마가 아직까지 힘들게 대형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시는 줄 몰랐고, 동생이 내게 서운한 감정이 쌓인 줄 몰랐다. 오직 가족만을 생각했던 아빠를 근엄하다고 탓했던 내가 미웠다.
이젠, 대중들보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것, 웃음 포인트, 힘든 점들을 알아보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감히 찰리 채플린의 명언에 한 줄 더 보태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웃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끝-
주인공 수식어를 좀 바꾸면 좋겠다.
이건 영 아닌 것 같다.
왜 갑자기 주인공이 가족들을 웃기려고 하는지부터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최고의 개그맨인데 마약을 하는 바람에 망해버린 거라도 있어야
미안해서 가족들이라도 웃길 것 같고 엄마가 마트 캐셔로 일하는 게 수긍될 거다.
이건 영 아니다! 바꿔라!!
나의 지적은 로그라인에서 주인공 수식어를 바꾸자는 거였다.
그래야 결말의 페이오프가 더 살 테니 말이다.
그것이 반영된 작문이 바로 아래의 것이다.
정독해보자!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역시 세계 최고의 코미디언다웠다. 내 인생 또한 친구들이 봤을 때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 코미디언이었지만 현실은 대학로 극장에서 열리는 코미디 쇼에 아무도 오지 않는 망한 코미디언이었으니까. 오늘도 관객은 0명. 벌써 1년째 이 모양이다. 난 실패했다. 이젠, 포기하련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내 무대 한 번 보여주고 오늘 밤 12시에 이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가족들에게 오늘 내 소극장에 와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오후 6시.
가장 먼저 엄마가 도착했다. 이마트 캐셔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오신 듯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공산품들의바코드를 횡단보도 삼아 생계를 이어오신 우리 엄마. 엄마에게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같은 슬랩스틱이 제격이리라. 엄마를 객석 1열에 앉혀 놓고 사각형 모양의 콧수염, 엉성한 신사 모자, 지팡이까지 완벽하게 채플린 분장을 한 뒤 현대 노동자들의 삶을 토대로 슬랩 스틱을 열연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엉성하게 걷다가 넘어지고, 널브러진 참치 통조림들을 잘못 밟아 진열된 상품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실려 가는 <모던 타임즈>를 오마쥬한 슬랩스틱까지! 하지만 완벽한 열연을 끝내고본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은커녕 걱정만이 서려있었다.
“아들,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넘어질 때 엉덩이 뼈 크게 부딪히던데 안 아프니?”
아차, 웃음보다 내 걱정이 먼저인 엄마였다.
오후 8시.
두 번째로 동생이 도착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 ‘샤’ 대학교 공대에 다니는 내 동생. 오늘도 화학 실험 때문에 늦게 끝난 듯했다. 엄마를 웃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웃기리라. 대학생들에게는 요즘 유행하는 ‘인싸 개그’면 백발 백중이었다. 객석 1열에 동생을 앉혀놓고 요즘 유행하는 ‘인싸 개그’를 퍼부었다.
“내 얼굴 잘 생긴 거 인정? 어 인정”
“동의? 어 보감”
“고등? 어 조림”
“머라이? 어 캐리”
하지만 동생의 얼굴에는 웃음은커녕 찡그림만이 배어 있었다.
“형, 무슨 소리야?”
아차, 내 동생은 공부만 하는 ‘아싸’였다.
오후 10시.
마지막으로 아빠가 도착했다. 여의도에서 회사가 끝나자마자 달려오신 아빠였다. 비록 엄마와 동생은 실패했지만 아빠만은 확실하게 웃길 수 있었다. 50대 중년들에게는 사회 풍자 개그가 취향저격이었으니까. 객석 1열에 아빠를 앉히고 사회 풍자 블랙 코미디를 보였다.
“박근혜가 간장을 먹으면? 간장 치킨!”
“이명박이 멜빵을 입으면? 미키마우스!”
언제나 정치 풍자 블랙 코미디는 관객들의 정치에 대한 답답함을 뚫어줬기에 확실했다. 하지만, 아빠의 얼굴에는 웃음은커녕 불쾌함만이 서려 있었다.
“…”
아차, 우리 아빠는 자유코리아당 지지자였다.
결국, 난 마지막 무대에서 가족조차 웃기지 못했다. 나란 놈은... 못났다. 어서 가족들을 보내고 무대를 정리하고, 12시 정각에 내 삶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아빠가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으니 외식이라도 할까?”
생각해보니 이렇게 온 가족이 모인 것도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마트 일로 바쁘셨던 엄마, 공부만 했던 동생, 회사 업무에 치여 사셨던 아빠까지. 하지만 오늘, 나를 위해 소극장까지 달려와 준 가족들이었다. 비록 내게 코미디에 대한 재능은 없었어도, ‘나’를 보러 와주는 나만의 ‘관객’들이 있었다.
11시 59분.
나만의 관객들과 극장 근처 삼겹살 집에서 외식을 했다. 신기하게도 무대에서는 웃지 않던 가족들이 모이자 서로의 이야기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내 인생의 관객들을 위해, 조금은 더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12시.
아니 0시.
소주잔을 부딪히며 건네는 웃음에,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그리고 감히 찰리 채플린의 명언에 하나 얹어 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
-끝-
그리고 작문 준비에만 국한된 서울예대 극작과 입시 대비는 바람직하지 않다.
작문 전형만 붙는다고 최종 합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면접 대비를 하지 않는 입시생이 너무 많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러고 있는 건가?
말발 좀 좋다고 어디서 들었을 순 있다.
근데 그게 면접장에서 먹히길 바라는 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극작과 교수들을
너무 허투루 아는 거 아닌가?
면접 대비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