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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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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계

by 김봉민 2018. 10. 10.

나는 올해,  친가족과 관계를 단절하기로 했다.

그러니 점점 객관적인 것들이 다가오고 있다. 

나의 고통은 뿌리가 깊다. 그걸 제대로 보는 게 힘들다. 

그래서 이렇게 온힘을 주어 적어서 온힘을 주어 계속 지켜보려 한다. 

그래야 이 뿌리 깊은 것이 나한테서 멈춘다. 

더 이상 가지치기를 못 하게 해야 한다. 




.친조부, 친조모

성함 모름

슬하에 8남매가 있었고, 셋째이자 차남이었던 

나의 친부가 십대초반이었을 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음



.친부

1950년생, 정읍 출신. 국졸. 현재 직업은 현장 건설직

당시로선 꽤 늦은 나이인 31살에 나의 친모와 결혼,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상경하여 

서울 동북부에 같이 살기 시작했다는데, 

정확히 몇 세에 상경한 건지 나는 모름.

결혼 초기엔 방범대원을 했다고 하고, 

내가 태어났을 때쯤엔 중동으로 두번째 장기 원정 건설 노동을 떠났다고 함.

첫 번째가 사우디아라비아, 두 번째가 예맨인 걸로 알고 있음.

재산은 면목본동의 빌라 한 채가 거의 전부. 

 

선으로 만난 친모랑 결혼하기 전에 

돈을 많이 모아뒀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거짓말이었던 게 들통나 

특히 외삼촌의 반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막내고모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정읍집의 마당을 아주 자주 쓸었다고 함. 

심한 결벽증이 있음. 하루에 집 청소를 5번 넘게 함.

 

막내고모부가 노가다 십장이었는데(지금도 아마 그럴 것임), 

막내고모가 결혼한 후 손아래인 막내고모부를 따라 

본격적으로 노가다 업계에 뛰어든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막내고모부와 주먹질 하며 싸운 적도 몇 번 있었다

 

동생 둘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살며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있는지 본인보다 먼저 동생들이 집을 장만했을 때 

굉장히 괴로워 했었음. 

 

입이 심각하게 거칠고 큰돈 쓰는 걸 매우 싫어함.

음주와 흡연을 자주 했었으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10년 전 쯤에 음주는 대폭 줄이고, 금연엔 성공함.

그 전엔 폭음하고 길바닥에서 자다가 내가 엎고 온 적이 있고, 

술집에서 싸움난 걸 데리고 온 적도 있으며, 집에서 자다가 

소변을 누워서 치운 적도 있다. 언제나 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몸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건강에 대한 염려가 커서 

일 안 나가는 날엔 꼭 병원에 가서 이런 저런 약을 받아오곤 했다. 

취미랄 게 없고, 친구라고 부를 사람도 없음. 

친모를 따라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아, 

성당에 나가지만 욕설의 횟수는 변함이 없음.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은 전국노래자랑과 6시내고향.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읽을 수가 없었음. 맞춤법을 논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친형과 내가 나이를 먹고도 제대로 자리를 못 잡자

폭언이 심해졌다.


딱 지금 내 나이 때 나를 나았구나.




.외조부

나의 친모가 어렸을 때부터 머리(아마도 뇌인듯)에 문제가 있어서 

늘 집에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친모가 10대 초반이었던 시절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조모

91세에 별세. 2009년에 소천. 

외조부와의 결혼이 2번째 결혼이었고, 

외삼촌, 나의 친모와 달리 성이 '신'씨인 이모 둘도 자식으로 두었다. 

큰이모와는 나이가 열 몇 살밖에 차이가 안 남. 


나의 친모를 어렸을 적에 경제형편이 안 좋아 

이모할머니집에 보내어 자라게 한 것 때문에 유독 나의 친모에겐

잘해주셨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나와 나의 친형에게도 늘 인자하게 대해주셨는데, 

사후에 들어보니 다른 손주, 증손주들에겐 안 그랬다고 함. 


노년즈음에 이르러 다니기 시작한 성당을, 정말 열심히 다니셨고 

그 영향으로 나의 친모도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임. 




.친모

1956년생. 양평 출신. 

어린 시절 가난한 경제 형편 때문에 

외조모와 같이 지낸 시절이 좀 있었던 듯. 

외삼촌과 사이가 나쁘지 않음.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상경하여 10대 시절 평화시장 미싱 공순이로 일했었고, 

내가 어렸을 땐 반지하 집에서 일을 받아 옷수선을 하곤 했음. 

내가 중학생이 된 후부터 대형마트 냉동 코너에서 판매직을 했다. 


국민학교 6학년까지 거의 대부분 전교 1등에 반장이었던 친형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

촌지도 선생들한테 좀 주고 그랬었음. 친형이 5학년 때인가 시험에서 좀 틀려 

전교4등인가 한 적도 있는데, 그때 목욕 중이던 친형을 체벌하고 알몸인 채로 

집밖으로 내쫓은 적이 있는 등, 친형에 대한 기대감이 몹시 컸음. 

친형한테 잔소리한 것 때문에 손위인 큰어머니와도 다퉜었음. 


나와 친형이 어렸을 때 손찌검을 많이 했는데, 

언젠가부터 때리려 하면 힘으로 막으니 그때부턴

손찌검을 포기했음. 친형이 중학교 입학 후 가출을 몇 차례 하자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고, 친형이 광기를 보이며 

정신을 잃는 일들이 몇 차례 생기자 비로소 성당에 다니기 시작. 


가족이 전부 세례를 받아 성가정이 되게 하고 싶어했고, 

결국 모두 세례를 받자 친형과 나의 반려자는 반드시 

카톨릭이어야 한다고 주의시켰음. 

잊지도 않은 며느리의 종교의 자유를 두고 

친형과 몇 번 설왕설래를 했음. 종교에 있어선 타협이 없음.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후로 성당 관련 일이라면 

빼놓지 않고 챙기며 관심을 보이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내가 4학년즈음 됐을 때부터 친형과 나의 끼니를 따로 안 챙겨줬음. 

그때문에 10대 시절 나와 친형은 평균 이하의 체중이었고. 


(내가 군대가기 며칠 전에 닭한마리칼국수 먹었던 것이 내 기억 속 첫 외식이다)


키가 150이 안  되고, 내가 어렸을 때 반에서 

키번호 1번이었던 걸 미안해 하곤 했다. 


가사는 친부가 알아서 다하기 때문에 하는 게 거의 없었고, 친한 사람들과 모이면 

대부분 일방적으로 말하는 역할을 맡았음.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는 걸 본 기억이 없음.


몇 년 전부터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을 풀고자 

초등교육과정부터 다시 밟기 시작함. 

방통대 진학까지 목표로 삼고 있다. 

내가 친부와의 극심한 갈등을 겪어 모텔을 전전하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문자를 보냈을 때,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험 공부하느라 정신 없어 답장을 못했었다고 추후에 말했다. 





.친형

1981년생. 국민학생 시절엔 동네 수재. 

내게 한글 가르쳐준 당사자이기도 함. 

6년 연속 반장. 집에 돈이 없어서 전교회장은 못 했었음. 

중학교 들어가선 가출을 계속 감행. 중3땐 자다가 정신이 나가서 

빌라 2층에서 점프하는 등, 광기를 보임. 

고등학생 땐 오토바이를 사려고 롯데리아에서 알바. 

고3때 갑자기 수능에 매진. 서울대에 집착. 

내리 5수를 해버림. 2002년 수능 땐 당시 고3이었던 나랑 같은 건물의 같은 층에서 

3번째 수능을 봤는데 나보다 수능 점수가 낮았음. 

4수, 5수는 집안 차원에서 내게 거짓말을 하고 수능을 치렀음. 

나는 친형보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안 좋았으니 

그렇게나 공부 잘했던 친형도 도전해서 실패한 재수를 해봤자 

명문대학 못 갈 거라는 논리로 나의 재수를 막았었음. 

결국 5수 해서 한양대 철학과 입학. 


자신에 대한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나와 자주 싸웠음. 

어렸을 땐 아무 이유없이 나를 폭행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내가 고등학생이 된 후 체격조건이 대등해졌고, 몇 번 나한테 가격당한 후엔 

물리적 충돌은 피하기 시작했음. 



2차례 교내 문학상을 받았고, 졸업 즈음부터 로스쿨을 목표로 삼았지만, 

3~4년 실패하더니 갑자기 신춘문예 준비하겠다며 글 쓰는 것 같다가 

다시 노무사인가 준비하다가 그마저도 안 되어서 공무원시험 준비. 


그것도 실패한 후 재작년부터는 면목동 집을 떠난 모양. 

지금은 뭐하며 먹고사는지 알 수 없다. 



부모와의 연락을 두절해버려서 친모가 내게, 내가 동생이니 

친형에게 연락 좀 해보라고 누차 말했었으나, 

내가 그럴 이유가 없어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 생일날, 나 태어났을 때 병원 가서 

봤던 게 생각난다며 그때 엄마가 고생 많았으니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 갖으라는 투로 메시지 보내와서 답장하지 않았었다. 


우아한 학벌과 직업을 갖고 싶어 했다.

허나,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관찰한 결과, 공부하는 방법을 모름. 

시험을 준비한다면서도 아침에 컴퓨터 하다가 잠들고, 

늦은 점심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깐 공부하고, 컴퓨터 하다가 잠드는 패턴. 

생활력이 바닥. 친부의 잔소리에 자기 먹을 인스턴트 식품을 자기 방 장롱 안에 

쟁해두고 그걸 자기만 먹곤 했음. 

 

 

내가 면목동집을 떠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러 집에 갔던 날, 

자기 옷 가져가지 말라고 밖에까지 쫓아나와 내게 욕을 했었음.

근데 그 옷 내 옷이었고, 그 상황에 그런 거 따지기는 싫었고, 

그때 내가 옷을 왜 챙기는지 뻔히 알 텐데, 그러고 있는 친형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 옷 주고 나왔었음. 

이러한 유형의 추억이 많다. 




병원 임상실험 알바를 자주 하려 들었고, 

나 몰래 내 명의 도용해서도 했음. 5년인가, 그랬음. 

한 사람당 법적으로 1년에 1번 이상은 받을 수 없기 때문.

편히 돈 벌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음.  내 명의 도용한 거 발각된 후에도 

처음엔 사과할 거 없다는 입장이었다가 나중에 사과해왔음. 

그마저도 자신이 갈망하는 우아함을 위해서였지, 

나의 항의에 대한 적절한 언급은 없었음. 그게 나와의 마지막 연락이었음. 



꿈은 굉장히 높은데, 그걸 이루려는 적확한 노력과 목표는 부족하여 

매번 뭘 해도 실패하는 자기망상적 인간. 


친부와의 갈등은 깊지만 친모에 대한 애정은 많아서 

아마 친모랑은 지금쯤은 알게 모르게 연락하고 있을 것 같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적어보려 했지만, 

객관은 사실 '덜 주관'의 다른 말이다. 

분명 내 분노의 필터가 개입되어 있을 터.

그러나 내 분노는 진짜다.  



친부는 내가 하는 일이 돈도 안 되는 일이라며 매번 쌍욕을 해왔다. 

독실한 카톨릭인 친모는 그 모든 걸 알면서 방관하며, 

늙어가는 본인들을 위해 다달이 돈을 줘서 

본인들의 노후를 책임져 달라는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나보다 돈이 수백배 많단 걸 나는 알고 있었고, 

내가 만약 생활비를 책임지면 나는 대체 무슨 돈으로 결혼자금을 

마련하냐고 물으니, 그러니까 돈 많은 여자를 만나라고 했다. 

결혼 할 때 돈을 보태줄 경제적 여유가 없단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해왔다.


나는 내 인생이 다른 이를 위한 재단에 놓여지는 

공물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밖에도 내 분노의 디테일은 차고 넘친다. 

분노를 적는 게 목표는 아니다. 

내 가계의 구체적 정보를 적어 내 인생의 참사가 발생한 

여건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는 게 목표다. 


나는 내 인생이 다른 이를 위한 재단에 놓여지는 

공물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나름의 이유 없는 참사는 없단 건 안다. 

절대악이라서 멀어지기로 한 것이 아니다. 

더 심한 참사가 속절 없이 예상되므로 

피난에 나선 것이다.  이 뿌리 깊은 것이 나한테서 멈춰야 한다. 

어려서 제대로 된 부모의 역할을 못 보고 자란 사람이 부모가 되니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준 건 그저 본인들도 거부하고 싶어했던 분노와 고통이 대개다. 
그러한 부모에게서 자란 자식 둘은 그나마 있는 한정된 기회와 자원 안에서 
서로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를 하는 법도 잊고 지지고 볶아왔다. 
나는 괜찮다. 내 몫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 이렇게 뿌리 깊게 자리잡은 분노와 고통의 유전자가 
다른 이에게 가지치기 하며 뻗어나가게 하는 건 안 괜찮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깽판이 되는 재료가 되게 하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이걸 막는 것 또한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