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은 세다.
나는 나 자신도 잘 못 바꾼다.
그런데 하물며 내가 다른 이를 바꿀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깝거나 허튼 일에 힘을 쏟는 걸 두고
삽질이라 한다.
기대를 하지 말자. 사람은 자기가 바뀌지 않으면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이 결딴날 것 같을 때에나
비로소 바뀔까 말까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할 것은 기대가 아니라,
기다려주는 것 뿐인 것 같다.
딱 그 기다려주는 시간 만큼이 그 사람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기다려봤던 사람들도 나를 기다렸던 그 만큼만
내게 애착을 뒀던 것이다. 나를 결국 기다리지 못해
관계가 절단나버린 걸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3일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증명되어버린 나와 그 사람들의 함수 공식.
진실을 목격했을 때 필요한 건 눈물과 한숨, 혹은 분노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일 테니 말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했던 말과는 상당히 관련성이 부족하지만,
오늘 이런 생각도 했다.
저출산을 우려하는 작금의 인간과 세계는 정말이지,
괘씸할 정도로 이기적이다.
그 우려 속에는 미래에 태어날 인간들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시대의 인간들이 늙어버렸을 때,
저하된 이 사회의 생산성과
경제적 불안감만이 반영되어 있다.
태어날 인간들이 지금의 인간들을
부양해줘야 한다는 썩어빠진 근성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끔찍하다.
세상의 관성은 세다.
얼마나 센지 알겠다.
얼마나 센지 알아야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이 보이겠지. 나 자신을 기다려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