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

1년 후

by 김봉민 2017. 8. 23.

1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는 것은 나의 유서 깊은 습관이다.

오늘은 한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면서 2016년 이맘때쯤을 더듬어봤다. 

일단 요한묵시록의 그것을 연상케 했던 그 패죽이고 싶었던 더위. 

집에 에어컨이 없던 나는, 늘 축쳐져있었다.

그리고 젖어있었다.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에어컨을 설치할 수 있었으나, 

기를 쓰고 설치하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나에게서 이기기 위함이라고 

어딘가에 적어도 놨던 것 같다. 허튼 호승심이었다. 

망할 허세였다. 그냥 돈 좀 아끼려다가 때를 놓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작년 여름 정말로, 이 위대한 자연 현상 앞에 나란 일개 인간은 

그 얼마나 보잘 것 없었던가. 

몹시도 외로웠다. 축제가 끝나버린 느낌이었는데, 

한사코 부정하며, 다시 시작해보자고, 실은 제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집에 에어컨이 없으므로 늘 축쳐져있고, 젖어있던 나는 

소망했다. 그때 나는 욕을 왜 했을까. 

너무 더워서였겠지. 혹은 그 모든 게 민망했던가.


그리고 1년이 지난 오늘 새벽엔 한강 인근을 자전거로 달렸다. 

아이고, 그때 그놈 참으로 장했다, 

페달을 실컷 밟았다. 

또한 부록으로 1년 후도 그려보다가,  

모르겠더라. 그래도 그때는 2017년, 지금을 

요한묵시록의 전조였다고 말하진 않겠지.

아닌 게 아니라 그래도 다행히 에어컨과 

에어컨 같은 사람이 내 인근에 있으므로, 

이 여름, 나는 강력하게 보호 받는 느낌이다. 

마땅히 내가 때려 부술 수 있는 건 때려 부수면서, 

내가 보호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걔 중 하나 이상은 

반드시 보호하면 좋겠다. 

이조차 과대 소망이진 않겠지. 

이 만큼의 선량한 기대나 포부도 없이 나이만 먹는 우둔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알고는 있다. 

1년 후는커녕 내일 하루 정확히 구체적으로 뭘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보잘 것 없음을. 

그러나 말은 씨앗이 된다고 어디서 읽었었다.

내 10년 전 일기에 적혀 있다. 내가 썼다. 

내 소박한 역사의 명과 암을 시시때때로 염두하며, 

무언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언제 어디선가 감사할 일을 어떤 모양새로든 받은 게 틀림 없을 테니, 

모쪼록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