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류의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 계열 금언들이 있다.
즐기긴 뭘 즐겨. 즐길 만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피하고 싶단 마음 같은 게 생성됐을 리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내 앞에 얼쩡거리지 못 하게 조치를 취해라.
경찰에 고소를 하든가, 심부름센터에 전화해보는 걸
고려해보든가, 그것도 아니면 그놈의 약한 고리가 뭔지
자료 조사라도 해야겠지.
피할 수 없으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하든가.
근데 나도 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에서
언급되는 피할 수 없는 것은 꼭 사람만인 건 아니다.
어떠한 사태나 의무 같은 것도 해당되겠지.
가까운 이의 죽음.
사랑했던 자와의 이별.
세금.
어른 노릇을 하기 위한 취직 준비.
이것들은 더더욱 즐기긴 어렵다.
즐길 만한 걸 즐겨야지, 피할 수 없는 걸 굳이 즐길 이유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거 아닌가.
피하고 싶어진 이유는 공포심 때문일 텐데,
어떻게 에일리언 앞에서, 피할 수 없으니
그래, 즐겨보자! 라는 마음을 가지라고 떠드냔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는 게 진심이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게 되어서 많이 무섭겠네.
근데 거기에 외로움까지 보태지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으니
내가 이번에 같이 있어줄게.
그리고 잊지 마. 모든 건 기브 앤 테이크야.
너도 나중에 내가 이렇게 되었을 때 옆에 있어줘.
자, 그럼 피할 수 없으니 이제 같이 한 번 겪어보자.
두 손을 꼭 잡아보자.
나는 또 안다.
나의 이런 말들이 상당히 삐뚤어져 보인다는 걸.
그러나 삐뚤어져 보일 게 두려워
소신이 아닐 리 없는 말들을 못 하는 인간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나는 살아도 죽은 거다.
숱한,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 계열 금언에 속으며 나이를 먹어왔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그들이 건네줬던 충고와 조언들이 사실은
그 어떠한 빅엿보다 더 거대한 빅엿이란 걸 깨달으며 사십대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될 요건이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난 널 응원해, 넌 잘 될 거야,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 헛소리는 그 사람의 고통을 장기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데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그게 바로 거대한 빅엿이다.
나는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나는 현재를 산다.
나는 낭만 속에 살지 않는다. 지독한 현실 속에 산다.
귀에 와닿은 금언이 부족해서 고통이 커졌던 게 아니다.
내가 삐뚤어진 거라면 차라리 삐뚤어지고 삐뚤어지고
계속 더 삐뚤어져서 아예 360도가 될 때까지 삐뚤어지며
그 무언가를 피할 수 없어서 끙끙거리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탐색하며 전전긍긍해보거나 싸워보겠다.
아니, 싸우긴 뭘 싸워. 싸우는 건 싫다. 어쨌든 탐색은 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