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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민 칼세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류의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 계열 금언들

by 김봉민 2026. 6. 1.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류의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 계열 금언들이 있다. 

즐기긴 뭘 즐겨. 즐길 만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피하고 싶단 마음 같은 게 생성됐을 리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내 앞에 얼쩡거리지 못 하게 조치를 취해라. 

경찰에 고소를 하든가, 심부름센터에 전화해보는 걸 

고려해보든가, 그것도 아니면 그놈의 약한 고리가 뭔지 

자료 조사라도 해야겠지. 

피할 수 없으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하든가. 

 

근데 나도 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에서 

언급되는 피할 수 없는 것은 꼭 사람만인 건 아니다. 

어떠한 사태나 의무 같은 것도 해당되겠지. 

가까운 이의 죽음. 

사랑했던 자와의 이별. 

세금. 

어른 노릇을 하기 위한 취직 준비. 

이것들은 더더욱 즐기긴 어렵다. 

 

즐길 만한 걸 즐겨야지, 피할 수 없는 걸 굳이 즐길 이유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거 아닌가. 

피하고 싶어진 이유는 공포심 때문일 텐데, 

어떻게 에일리언 앞에서, 피할 수 없으니 

그래, 즐겨보자! 라는 마음을 가지라고 떠드냔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는 게 진심이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게 되어서 많이 무섭겠네. 

근데 거기에 외로움까지 보태지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으니 

내가 이번에 같이 있어줄게. 

그리고 잊지 마. 모든 건 기브 앤 테이크야.

너도 나중에 내가 이렇게 되었을 때 옆에 있어줘. 

자, 그럼 피할 수 없으니 이제 같이 한 번 겪어보자. 

두 손을 꼭 잡아보자. 

 

나는 또 안다. 

나의 이런 말들이 상당히 삐뚤어져 보인다는 걸. 

그러나 삐뚤어져 보일 게 두려워 

소신이 아닐 리 없는 말들을 못 하는 인간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나는 살아도 죽은 거다. 

 

숱한,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 계열 금언에 속으며 나이를 먹어왔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그들이 건네줬던 충고와 조언들이 사실은 

그 어떠한 빅엿보다 더 거대한 빅엿이란 걸 깨달으며 사십대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될 요건이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난 널 응원해, 넌 잘 될 거야,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 헛소리는 그 사람의 고통을 장기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데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그게 바로 거대한 빅엿이다. 

 

나는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나는 현재를 산다.

나는 낭만 속에 살지 않는다. 지독한 현실 속에 산다. 

귀에 와닿은 금언이 부족해서 고통이 커졌던 게 아니다. 

내가 삐뚤어진 거라면 차라리 삐뚤어지고 삐뚤어지고 

계속 더 삐뚤어져서 아예 360도가 될 때까지 삐뚤어지며 

그 무언가를 피할 수 없어서 끙끙거리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탐색하며 전전긍긍해보거나 싸워보겠다. 

아니, 싸우긴 뭘 싸워. 싸우는 건 싫다. 어쨌든 탐색은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