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클로드 모네
작성일 : 2014. 3. 30. 일요일 08:56 PM
무언가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를 적을 땐
사실 가장 절망적이었을 때였다.
그런 식으로라도 기합 같은 이야기를 적지 않으면
너무 두려웠던 거다.
맷집은 늘기 마련이란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그냥 표현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아픈데 아프다고 안 하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아픈 걸 표현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했고,
나도 힘들었다.
맷집은 느는 게 아니고, 맞아서 아픈데 안 아프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아직 괜찮다고 스스로한테 최면을 거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아무리 예상을 하고 준비를 했어도
타이슨한테 한방 맞으면 고통의 크기는 별반 차이는 없다.
그냥 쓰러져버리면 그만 맞기라도 하지,
가드를 올리고 버틸수록 매맞는 시간과 양이 올라간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스스로에게 훈장이
될 순 있어도 조금이나마 덜 고달픈 미래를
담보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왜 이런 고통을 사서 경험하기로 결정했나
과거를 곱씹어보면, 그 속에 진짜 답안이 숨어있다.
내 일이 될 건데 마치 남의 일인냥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를 거야,
이랬는데 다르긴 뭐가 달라. 나도 남들과 거의 같았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무식함이 유독 심했다는 거다.
모 아니면 도, 라는 마음으로 한번뿐인 인생을 판단하고 올인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나타났고,
나는 마음에 문둥병을 달고 산다. 절망적이다. 그리고,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를
적게 되는 거라고 처음에 말했다.
그럼에도 또 뭔 사태가 벌어지고 끙끙거리게 돼도
내가 세상에 맞아죽는다거나 가난에 굶어죽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이제 이것이 나의 가장 희망찬 이야기다.
이 희망을 언제까지 소리칠 수 있을까.
더 이상 소리칠 수 없을 때 절망이 현란한 스탭을 밟으며
나를 또 때리겠지.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고, 최면에 빠트리지도 말고,
다만 아프면 아픈 만큼 우는 용기가 내게 생기면 좋겠다.
2년 전, 왜 그리 절망적이었는지 (기억난다. 다행이다)
시간이 저녁 8시 56분인 걸 보면 술도 안 마시고
맨정신이었을 텐데,
아주 그냥 절망이든 희망이든 콸콸콸 쏟아냈구나.
(근데 아직 아프면 아픈 만큼 우는 용기는 내게 없다)
이 이후엔
'절망도 희망도 믿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사는 힘에 근거해 살자'
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절망은 노인네의 단어 같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희망은 초딩의 말 같고, 너무 원시안적이다.
묵묵히 살고 싶다. 근데 너무 어렵다. 말은 다 쉽지,
말 아닌 것은 늘 항상 어렵다.
김봉민의 지난 일기 - 너무도 절망적일 때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희망찬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