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바이 김봉민 / 인도에 갔을 때 찍은 부처님 깨달으신 보리수 나무
지난 일기를 보는 건 여러모로 유익한 일이다.
물론 대가도 따른다. 작년 10월의 일기를 보았다.
2015년 10월 4일 아침 7시 5분
거창하게 동대문부터 면목동 집까지 걸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거의 거창하게 도착해버렸다.
가급적이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고,
나는 그 미션을 거의 성사시켰다.
무념무상.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멜로디를 흥얼거렸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동네를 밟았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몇 장면의 추억을 회상할 뻔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자태로 동대문에서 면목동까지 와 버린 게
결국 거창한 꼴이 되었고, 그런 게 또 이유가 되어
나는 아침까지 잠 못 잤다.
빨리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
하지만 여기에서 ‘빨리’라는 단어만 제거하면
나는 좀 덜 괴로울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
여기서도 ‘만’이라는 조사를 빼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나의 공간을 갖고 싶다.
더 좋은 건 ‘갖고 싶다’를
생략해버리는 걸 텐데.
나의 공간을.
공간도 빼면 어떨까.
나의.
이왕 이렇게 된 거 ‘의’도 빼지 뭐.
나.
이게 그나마 가장 살아있기에 수반되는
고통을 줄이는 생각법- 무념무상에 근접한 상태일 텐데,
사실 또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거창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나’가 나한텐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
나는 앞으로도 줄창 저 뒤에 온갖 언어를 연이어 붙일 것이고,
이 문장만 잘 훑어봐도 이 사실은 거의 증명되었다.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라는 다짐도 결국엔 생각이었다.
인간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순 없다.
그저 좀 미니멀해지고 싶은 것이다. 생동감 있으면 더 좋겠고.
오늘 이 ‘동대문에서 면목동까지 최대한 무념무상으로 걷기’ 미션이
그러한 내 바램-바람이 맞지만 바램이라고 나는 계속 쓰려고-에
1푼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래서 언젠가 거의 거창한 인간이 되어주면 좋겠다.
무념무상과 미니멀을 통해
거창한 인간이 되고 싶다니,
이것 참 문제적 하루를 산 것만 같다.
위 일기를 쓴 지 1달이 조금 지난 2015년 11월 9일,
나는 망우동에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로부터 지옥을 맛봤다.
거창하도록 미니멀한 슬픔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참 다행인데, 월세 45만은 그 대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지금 여깄다.
김봉민의 지난 일기 - 미니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