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거창한 꿈이 있다거나 어딘가에 내세울 만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런 건 없다.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만, 없다고 말해도 상관 없을 정도로 희박하니,
없다 말해도 된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
꿈이 있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뜻이 있어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태어난 후에 억지로 꿈과 뜻에 의미를 두며
마치 그걸 위해 사는 것 마냥 구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태어났다. 태어나버린 거다. 던져지듯 세상에 나와버렸다.
출산을 간절히 원해서 했든, 아니면 임신이 되어버려서 그냥 여차저차 중절을 못 해서
낳아버렸든 어떠한 남자와 여자가 그 주범이란 말이다.
애초에 태어날 자에게, 너 태어날래? 라는 식으로 물어볼 조건은 성립도 안 된다.
그냥 부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결단을 하고는
자기와 닮았지만 명명백백 상당히 다른, 그런 한 인간을 세상에 내놓는 거다.
그렇게 나도 태어났다.
그리고 나 역시 꿈과 뜻 같은 걸 차츰 나이를 먹으며 내 삶의 목표로 설정하게 되었고,
그러한 결심에 따라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놈의 꿈과 뜻조차 온전히 내가 설정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욕망에 나는 물들었고,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바라보면 자동으로 시샘하는 버릇도 고스란히 나는 내게 이식해왔다.
과연 100% 순도의 나라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이기 이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부산물, 찌꺼기, 아주 좋게 말하면 일부라고 말하는 게
타당한 것만 같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기존에 가졌던 꿈과 뜻,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만 싶었던
내 삶의 의미는 이토록 허무한 것이므로, 응당 그에 맞게
허무주의에 잠식되어 대충대충 살길 바라나. 모르겠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결국 그들도 사실 타인의 생각과 욕망을 암기하고
내면화 하며 사는 처지이기에 뾰족한 답을 해줄 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깨져버린 거울을 바라보며 자문자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니면 책을 읽을까. 그건 나쁘지 않지만, 잔뜩 멋드러진 포즈를 취하고선
개기름 낀 목소리로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책들이 십중팔구이기에
내가 바라는 책을 엄선해야 하는 과정이 벌써부터 골치 아프다.
또한 내가 바라는 책이라는 것은 결국 남의 간섭을 혐오하는 내가
결국 내 귀에 기름칠 해줄 적당하고 달콤한 내용을 갖춘 것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이라는 말이 아주 절묘하게 어울리는 현재의 나는
이런 식이다. 그래도 책을 읽어봐야 하겠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책을 우선적으로 읽는 게 낫겠지.
아무리 나란 인간을 도끼로 내려 찍듯 일깨워주는 책을 만난도 해도,
책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므로, 죽은 자와의 대화는 정신병이므로,
아무도 모르게 깨져버린 거울을 바라보며 나는 또 나와의 자문자답을
진행해야 하겠지. 사실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나는 깨진 거울을 보며 자문자답을,
이렇게 일기 쓰는 형식으로 해보고 있다.
나는 궁금하다.
이 거울의 건너편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엔 어떠한 세상이 득실거리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없겠지. 나도 안다. 모니터 화면 건너편에는 온갖 회로가 있겠지.
근데 그런 거 말고,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의 건너편, 거기에 뭐가 있냐는 말이다.
나는 편안해지고 싶다,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렇게 소심하게 표현하지 말고, 우렁찬 목소리로
나는 편안해지고 싶다는 소리가 들린다,
라고 당당히 선언하고 싶지만, 그건 착각일 수 있으니,
소심해보이더라도, 이렇게 적는다. 나는 편안해지고 싶다,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이유는, 내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적 표현법에 의거하면 입신양명, 자수성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욕심이
내 안에 아주 꽉 차 있다. 근데 그게 요원하니, 편안하지가 않다.
그 욕심들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한다면,
나 자신의 나약함과 나태함이 8할의 지분은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시때때로 나는 셀프 채찍질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편안하지가 않다. 셀프 채찍질을 하여 개선이 되면 좋겠는데,
개선도 안 되고, 난 이렇게 태어났다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이보다 더 뭘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하는 건데,
나도 정말 벅찬 것들과 연거푸 마주하면서 쉽지 않게 살았다고,
라는 성난 볼멘소리가 목구멍에서 자꾸만 기어나온단 말이다.
그래, 나는 나약하다. 또한 나태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해져도 나는
셀프 채찍찔은 하지 않으련다. 나는 나약한 사람들 중에선 가장 강력하거나
강력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약할 뿐이다.
나는 나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부지런하거나, 부지런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태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사이 어딘가에 내 좌표가 있긴 있을 거고,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가. 나는 원한다.
나는 편안해지고 싶다.
입신양명 같은 낡아빠진 소리는 지워버리는 편이 낫다.
자수성가 같은 20세기 신화는 21세기에선 구라가 되었다.
부귀영화 같은 건 기원전부터 내려온 극소수의 환상이다.
그리고 내 욕심들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의 나머지 2할은
나에게 있지 않다. 세상에 있다.
아니라고? 나머지 2할조차 나에게 있는 거라고?
그럴 순 없다. 나는 세상의 부산물, 찌꺼기, 혹은 일부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세상과 완전무결하게 무관해야 하는데,
내가 여태껏 낸 세금이 얼마이며, 내가 마신 술값으로 인해
먹고 산 자영업자들이 몇 명이며, 2년 동안 군복무도 하며
이 사회에 대한 의무도 버젓이 지켜왔는데, 내가 어떻게 세상과 무관한가?
하물며 스스로를 세상사와는 무관한, 자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라면을 먹고, 돈 필요하면 장에 나가 물건 팔며,
틈이 나면 TV랑 스마트폰을 하던데, 무슨...
나의 이 불편함에는 이 세상의 몫이 2할 정도 있다. 땅땅땅.
이건 중간 결론이 아니라, 확정 판결이다.
나는 불편하다.
그래서 편안해지고 싶다.
이 전의 내 삶의 운영 방식이었던
입신양명, 자수성가, 부귀영화 같은 기치는 불태우고,
이제는 셀프 채찍질도 자행하지 말자.
대신 성질을 내자.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나머지 2할의 이유에 대해서.
잘 되든 잘 안 되든 그 성질이 담아낸 이야기를 만들자.
그럼 좀 편안해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