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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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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함정

by 김봉민 2021. 7. 7.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드라마는 덜 좋아했다. 거의 안 봤다. 

올드보이를 네멋대로해라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가 더 나은 미디어 장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조차 잊은 어떤 개허접 영화보다는 

제대 후 봤던 태릉선수촌 같은 드라마의 수준이 훨씬 높았다. 

나는 그저 몇 개의 좋은 영화를 주로 봤을 뿐이고, 

몇 개의 훌륭한 드라마들은 그저 접하지 못해 영화를 드라마보다 

높게 쳤던 것이다. 

 

어떤 영화는 어떤 드라마보다 낫고, 

어떤 드라마는 어떤 영화보다 낫다. 

각각의 미디어 장르 간에 우월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드라마보다 좀 더 중점적으로 보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을 좋아했다. 성격이 급해 조금이라도

빨리 엔딩까지 보고파 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너무 길다. 16부작 보려면 16시간이 투여되는데 반해

시네마천국 같은 인류 문화 유산급 영화는 다 보는 데 아무리 길어도 3시간이면 충분했고, 

그것은 소설을 보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반영됐던 것이다. 

일테면 소설가 박민규를 좋아했지만, 어디 가서 박민규의 작품을 추천해야 한다면 

단편소설집인 카스테라를 장편소설인 죽은왕녀를위한파반느보다 훨씬 더 많이 추천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본다면 카스테라에 실린 어떤 박민규의 단편소설의 수준은 

죽은왕녀를위한파반느보다 낫다고 할 수가 없었다. 

 

두 말 할 것도 없다. 단편소설이라는 장르가 장편소설이라는 장르보다 

더 낫다고 할 수가 없는 건 당연한 거겠지.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멜로 장르를 더 높게 쳤었다. 액션영화 장르는 거의 경멸하는 수준이었다. 

이터널선샤인과 봄날은간다와 첨밀밀, 멜로라고만 특정하긴 어렵지만,

여하간 중경삼림이나 시네마천국 같은 멜로 성향의 영화를 더 좋아했었다. 

더록이나 트루라이즈, 미션임퍼서블 같은 헐리웃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들을 

재밌게 봤으면서도 막상 어디 가서 내 인생의 영화를 뽑으라고 했을 때, 

액션 영화를 언급하는 건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짜증과 분노, 깊은 탄식을 자아냈던 이름조차 잊은 그 개허접 멜로들보다 

매드맥스, 다크나이트, 터미네이터2 같은 아찔할 정도로 훌륭한 액션영화들이 

훨씬 매우 아주 더 많이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봤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법은, 가난한 사람의 편이어야 하는가. 

부유한 사람의 편이어야 하는가?"

학생들은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요!

교수는 대답했다.

"법은 가난한 사람의 편도, 부유한 사람의 편도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의 편이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장르. 

부유한 사람이라는 장르. 

 

연이어 더 떠올려본다. 

 

여자라는 장르와 남자라는 장르. 

일반이라는 장르와 이반이라는 장르. 

보수라는 장르와 진보라는 장르. 

종교라는 장르와 과학이라는 장르. 

 

기타 등등등등. 

 

그래, 뭐든 좋다. 

하지만 협소하기 그지없는 나라는 인간의 기본적 성향에 기반한

특정 장르 선호. 나는 그걸 장르의 함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장르의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말하고, 심지어 행동까지 취하는 우둔함을 경계해야겠다. 

그것이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것마다 그 수준이 매우 낮을 것 같기 때문이다. 

수준. 그래, 수준. 장르의 함정 말고, 

 

수준. 

 

나는 수준 높은 것들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수준 높은 것과 수준 낮은 것을 가리는 기준이란 무엇인가, 라는 반문이 

따라오겠지. 그 기준에 대해선 나중에 <수준의 기준>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또 써봐야 하겠다. 

이제 가서 일이나 하자. 오늘 일 마치고는 드라마 하나랑 장편소설을 좀 접해보자. 

오늘은 여기까지. 끝. 

 

내가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