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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고시 필기 교육 전문 <퓌트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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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죽을 뻔

by 김봉민 2021. 2. 14.

오늘 죽을 뻔 했다.

 

오늘 한솔이가 줄 게 있다고 했다. 

원래 한솔이가 자기 일 마치고 우리집에 온다고 했는데,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한솔이 일 마칠 시간에 맞춰서 

한솔이 있는 곳 인근에 갔다. 

 

6시 10분 정도에 우리는 만났다. 

내가 와서 기다릴 거라 생각 못 했던 한솔이는 나를 보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내게 준 건, 쵸콜릿과자였다. 오늘 발렌타인데였다며. 몰랐다. 암튼.)

나는 복지리를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한솔이 밥 먹는 거 구경하는 셈 치고 

수지 롯데몰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그냥 너희 집 가서 집밥 먹는 게 어떻겠냐, 

물었고 어영부영 경로를 꺾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파트 안 길로 들어섰다.

 

연휴의 마지막 날. 주차된 차들은 가지런히 안전한 모습으로 있는 듯했다. 

 

나는 오늘 들은 '운명의 과학'이라는 책의 내용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한솔이는 원래도 내 말에 경청을 잘해주는 타입이지만, 오늘은 왠지 더욱 귀 기울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더 들뜬 채, 뇌과학과 인문학과 심리학 이러쿵저러쿵 운명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나의 왼편으로, 화장실이 시급한 것처럼 걷는 한 여성을 보았다. 

나이는 88년생쯤 되었을 것 같았다. 어그부츠를 신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쩜 저렇게도 쫓기는 걸까. 여유가 실종된 순간을 가장 회피하기로 한 

나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투의 짧은 의의를 속으로 다잡으며, 

연이어 운명의 과학에 대해 한솔이에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소박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그때쯤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파트 안엔 차가 많았다. 모든 차가 안전하게 있는 건 아니다. 

 

너 뭐 먹고 싶은데? 

내일 치과 꼭 가자. 

내일 기흥 아울렛 가서 신발도 사자. 

대략 이런 소재의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발렌타인 데이 같은 거 안 챙겨도 오늘은 바로 한솔이를 

집에 보내긴 좀 그런 거 같아, 뭐라도 먹이고 집에 보내야지, 싶었다. 

그때 뒤에서 내 또래의 어느 남성이 나와 한솔이를 향해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거기요! 피해요! 피해! 

 

뭐라는 거야, 하고 뒤를 돌아보니 경차 하나가

꽁무니쪽 방향으로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꽤 빠른 속도였다. 그대로 오면 나와 한솔이는 제대로 경차 아래에 깔린 판이었다. 

으아, 으아, 나는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와 차 사이로 몸을 운동시켰다. 

한솔이는 당황한 채 그냥 그대로 서 있었고, 나는 과격하게 손으로 한솔이의 왼쪽 팔을 잡고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경차는 한솔이의 에코백을 스치고 지나갔다.

경차는 계속 뒤로 내달리며 한 6미터 정도 더 가더니, 결국 볼보SUV에 충돌했다. 

 

나는 이 사태를 만든 이에 대한 본능적인 살의를 즉각적으로 느꼈다. 

 

다행히 한솔이는 다친 데가 없었다. 이게 다 뭔가. 경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경차와 충돌한 볼보SUV의 차주는 우리에게 위험 신호를 알려준 남성분이었다. 

나와 한솔이가 차에 깔렸다면 남성분의 차는 멀쩡했을 거다. 

경차에 있는 전화 번호로 차주분은 전화를 했고, 이내 멀리서 한 여자가 뛰어왔다. 

아까 내가 봤던, 그 화장실이 급해보였던, 어그부츠를 신었던 여자분이었다. 

더없이 난처한 행동거지와 언변이었다. 여자분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배달이 처음이라 정신이 없어서"

 

초보 알바 배달러였던 것이다. 하여, 정신 없었던 모양이다. 

여유가 없어 자신의 경차를 내리막에 주차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안 잠궈두고 

배달에 나갔던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방금 전까지 차올랐던 살의가 경감되는 걸 느꼈다. 

물론, 괜찮으세요? 라는 질문에, 괜찮진 않죠.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라고 대답하며 신경질은 좀 부렸지만. 

나와 한솔이는 볼보SUV 차주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생명의 은인이었다. 

멀어지며 자리에 남은 두 분은 차분하게 보험처리, 같은 어휘를 사용하는 걸 들었다. 

 

단 게 땅겼다.

나와 한솔이는 설빙에 가기로 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운명의 과학'이란 책을 이야기했던 것도, 

내가 그 경차 차주분을 지나가며 봤던 것도, 신기했다. 

볼보 차주분이 우리에게 위험 신호를 주었는데, 

우리가 가까스로 피한 경차가 하필 그 볼보 차주분의 차에 

충돌한 것도 신기했다. 볼보 차주분은 어쩌면 위험신호를 우리에게 

준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배은망덕한 망상도 하다가 이내 철회했다. 

경차 차주분은 알바비 벌러 나왔다가 되려 혹을 붙이게 된 게 곤혹스럽겠지만, 

블랙박스 영상으로 정말로 나와 한솔이가 죽을 뻔 했던 걸 보게 된다면 

천만다행이라 여기게 되겠지. 

원래 한솔이가 우리집에 오게 했다면, 

아예 그 길로 들어서지도 않았을 테니 이런 사건이 펼쳐질 리도 없었는데 

굳이 내가 찾아와 이런 일이 생긴 것도 신기했다. 

어처구니 없이도 나와 한솔이와 볼보 차주분과 경차 차주분과

'운명의 과학'이라는 책의 저자와 그 아파트의 배달 음식 시키신 모종의 어떤 분과 

배민 창업주 김봉진과 발렌타인 데이라는 희대의 마케팅을 명절처럼 정착화 시킨 

제과업계 관계자들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것이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우연 속에서 기적적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것일까. 

운명이란 뭘까.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주제에 먼 미래를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겸허함이 엄습한다. 

그래도 당장은 살아있으므로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한솔이와 아주 오랜 시간 후에도 오늘의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 

그때도 안도의 한숨, 두숨, 세숨을 같이 쉬어보자. 

운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