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는 어렸을 때 부모랑 살지 못 하였다.
그래서 제대로 된 부모상을 그려보지 못 한 채,
부모가 되었다. 대조군이 없으니, 자기들이 하는 것이
최고의 부모 역할이라 믿었다. 자기들은 부모에게 뭐 하나 받은 것 없었는데,
자기들은 자식에게 뭐라도 주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므로 언어폭력과 그것을 방관하여 고착화 된 사태 역시,
당연히 자신들의 자식들이 인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최고의 부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자식들은
효도라는 보상을 해야 하며 그것이 마땅한 본인들의 권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식들은 앎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처음엔 주어진 기본값에 충실했으나 점점 알면 알수록
이 모든 게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앎이란 무수한 상황에서의 각자 다른 대조군들을 확인해보는 과정이다.
나는 악마로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결단코 돌아가지 않는다.
진짜 악마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나에겐 대조군이 있다.
뜻밖에도 나는 며칠 전에는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용기는 언제 생길까.
앎과 공포
가 생겼을 때.
앎을 통하여 자기가 확보한 대조군들을 재료 삼아
머릿속에 그려본 내 미래의 모습이
끔찍하고 추하여 실제 자기가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도
공포스러워질 때.
나는 내 부모와 함께하는 내 미래가 그랬다.
용기가 저절로 방출되었다.
대조군이 나를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