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운명의 8할은 부모와 그 부모를
그렇게 만든 조상들과
그 조상들이 조성해버린 세계와 결부돼 있다.
미국 비버리힐즈의 마이클과
르완다의 폴은 같은 지구에 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고민을 안고 살고 있다.
비버리힐즈에 태어날지, 르완다에 태어날지,
소녀소년은 선택권이 없다.
그리고 마이클과 폴을 얘기했지만,
사실 이 모든 게 나의 문제였다.
내 선택이 아니었던 내 기본값이,
자꾸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나 아닌,
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게 하고,
그게 네 팔자니까 그렇게 살아라.
눈 하나 도려내진 애꾸처럼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고,
그렇게 내내 내려다본 바닥엔 그늘이 지는데,
그 그늘의 모양새와 크기만큼이 나의 한계인가.
그리고 나의 부모와 조상들과 이 세계는 왜 이 모양이고
이렇게 거대한가.
눈 하나로도 어쨌든 세상을 살 수는 있지만,
안구에 잡히는 절반의 풍경은 참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그늘 안에서 어떠한 표식을 봤다.
바닥에 적힌 낙서 같은 그 소설에는
애초에 뜯겨져 나간 절반의 풍경 안에 안락하고도
온전한 것들도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목을 열심히, 아주 열심히, 돌려서 나머지 풍경도 봐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눈 하나라도 제대로 뜨고, 정확히 봐야
무엇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폴 같은 사람들의 2세들이
폴보다는 선택권을 많이 갖고 사는 데
힘을 보태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나의 2장에 낙서 같은 거라도 적어봐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