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들 글에 첨삭을 하는 걸로 돈을 꽤 번다.
이런 걸로 돈 벌려고 글쓰기 시작한 게 아니므로
이따금 자괴감도 들지만,
라면만 3끼 연속으로 먹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신파가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밥 한 공기 사주고 싶은데,
계산대 앞에 서기 머뭇거려질 때의 자괴감을 아는가?
사고 싶은 책 한 권이 있는데 통장 잔고 확인해야 할 때의
굴육은 또 어떠한가.
그러니 요즘엔 최대한 입을 다물고 열심히 첨삭을 하고 있다.
첨삭을 하고 있다, 라곤 했지만 사실 첨삭을 해주고 있다, 라는 식으로
처음엔 쓰려 했다. 그러나 첨삭을 할 수 있어서 위에 열거한
신파와 자괴감과 굴육을 좀 멀리 두고 살 수 있으니,
이건 해주는 게 아니라,
할 수 있어 감사한 일이라고도 봐야 한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아래는 오늘 내가 첨삭한 내용의 일부다.
그냥 여기에 한 번 남겨 놓고 싶었다.
나의 신파와 자괴감과 굴육을 멀리 하게 해주었으니,
이 친구를 비롯한 그 모든 친구들도 그것을 좀 멀리 두고 살았음 좋겠다.
그림은 역시 장 자크 상페
인간은 결국 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자. 좋은 책은 우물 안에 들어온 사다리다.
우물 밖으로 나갈 기회를 제공해준다.
물론 삶이란 끝없는 무한 우물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부단히 노력하면
자기가 나올 수 있는 우물의 숫자가 늘고,
그만큼 세상에 공헌할 기회도 늘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구태여 말하자면 독후감 같은 것도 꾸준히 쓰자.
중국집 배달원의 자격은 오토바이 면허증에서 비롯된다.
콘텐츠 만드려는 자의 자격은 부단한 자기 탈출 시도와 세상에 대한 이타심일 것이다.
중국집 배달원 같이 콘텐츠를 봐주는 이들이 있어 우리 같은 이들이 먹고 산다.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해보자.
대신 최소한의 면허는 따놓자. 면허도 없이 이걸 직업으로 삼겠다는 건 양아치의 심보 아닌가?
부단한 자기 탈출 시도와 세상에 대한 이타심. 고민이 수반되어야 마땅한 종류의 것들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극심한 고민을 세금처럼 여기며 계속해보자.
개요 자체가 작문처럼 되어버리면 안 된다.
요약 능력은 단순히 해당 내용을 잘 줄인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해당 내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거다.
완전히 장악한 것을 써야, 정확하게 쓸 수 있다.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개요가 작문처럼 된다는 것은
요약이 안 됐다는 거다. 개요는 요약 그 자체다.
건물로 치면 철근이며 기둥이고 대들보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완전히 장악해서 갖고 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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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하나만 더 추가해본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다.
영어로는 같다.
아이 씽크.
그러나, 알잖아.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다.
는 진짜 판이하게 다른 뜻을 지녔다.
나는 생각한다, 는 광장에 나온 느낌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같다.
반면 내가 생각한다, 는 밀실의 느낌이다. 독립적이다.
그냥 내 해석이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한글을 쓴다는 것은, 후려쳐서 말하자면 ‘조사’를 쓴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언어 예술을 감상해보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나타샤를 사랑하고, 와는 정말 다르다.
‘은’ 하나로 의미 변화가 심대하게 생겨버렸다.
영어에선 절대로 할 수 없다. 단언한다.
아닌 게 아니라 김훈도 내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참고로 내가 김훈이 한 말을 보고, 앵무새처럼 다시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한다...!)
한글은 정말로 섬세한 도구다.
이 도구의 섬세함을 이해해야 제대로 다룰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자. 조사의 위대함을 인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