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얼굴은 슬프지 않다.
나는 그 얼굴을 거의 매일 봐왔다.
우울의 얼굴을 슬프지 않고, 멍이 든 모습이다.
웃다가 울다가도 하는데 여하간 멍이 들어있다.
만지면, 아픈데, 아프다고 빽빽 소리를 지르지는 않고
찡긋찡긋거리다가 그냥 꾹 참기도 한다.
만성이다. 우울의 얼굴을 최상단에 달고 있는 몸뚱이는
드러누워 있고 싶어 하지만 드러누워 있다는 호사를
24시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에
그 얼굴을 맨 위에 달고 서거나 앉은 채 버틴다.
그리고 드러눕게 되면 드디어 드러눕게 됐다는 안도감과 만족감에
취하는 게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싶어진다.
의식의 흐름 같은, 잡스럽게 여겨지는 게 중단되어서 가장 편안한 상태에
머물고 싶어진다. 그 가장 낮은 단계는 아무래도 잠이겠다.
잠들면 편하다. 그러나 영원히 잠들 수는 없으니
영원한 잠과 가장 닮은 그것을 종종 왕왕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그 하소연의 절차와 과정조차 번거롭게 느껴지고
누군가와 이 마음을 나눈다고 이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아무래도 이 마음은 타인에게 오물이나 쓰레기처럼 느껴질 텐데
그런 걸 전달하여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우울의 얼굴에 아무리 메이크업을 한다 해도 결국엔 벗겨질 분칠.
그 격차감은 자학을 행사하게 하고 멍은 더 광범위해지고 색은 더 깊어지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안해낸 최선의 방법은 육체 혹사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노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달린다. 땀을 왕창 빼낸다. 이 우울의 얼굴이 땀에 젖을 때까지 달린다.
빨리 달리면서 달리기 실력을 높여 개인 기록을 갱신하려는 목적은
전연 없고, 오로지 몸뚱이를 혹사시켜, 몸뚱이가,
이렇게 힘들면 안 되잖아, 이러다 죽겠어,
조금은 살맛나게 해줄 호르몬을 전신에 분비시켜볼게, 라는
판단과 행동을 감행하게 만들기 위하여서, 달리는 거다.
나는 우울하고 싶어서 우울했던 적이 없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프로그래밍이 된 것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 가치관 형성이 시작될 무렵에
외부 환경에 의해 내 감정 매커니즘에 심각한 말썽이
발생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울하고 싶어서 우울했던 적이 없었단 말이다.
나는 우울하게만 있는 것에선 벗어나고 싶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우울한 인간이 아니라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으로 포지셔닝한다.
이 우울의 얼굴에 번져 있는 멍을 없애려 고의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온힘을 다해 내버려둔다.
그래, 여기 계속 있어라. 하지만 더 번지는 것은 용납치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달린다. 이러한 일련의 다짐과 과정이 내가 정의하는 행복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