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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채플린 마스터와 정의신 사형과 나

by 김봉민 2016. 8. 29.

2014년에 쓴 것 같은데 날짜가 안 적혀 있는 일기


더 킹 오브 코미디, 찰리 채플린 마스터더 마스터 오브 코미디, 찰리 채플린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찰리 채플린 마스터께서 영화 라임 라이트에서 처음 말했고, 정의신 선생님의 연극 겨울 선인장을 통해 처음 들은 이 말에 의탁해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무언가를 골백번 버텼다. 누군가는 예수님의 사랑,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풍부하게 살 수 있겠지만, 나는 용기, 희망, 그리고 약간의 돈,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세 단어의 비중이 늘 똑같지는 않았다. 사랑, 믿음, 소망,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처럼, 나는 돌아가며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 중 하나에 가장 의지하고, 화두 삼아 살았던 것 같다.


이십대 중반에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푹 빠져 살았다. 내 아버지 같은 친구, 인석이네 자취방에 미안함을 감수하고, 고마움은 애써 덜 표현하며, 사실 낯짝 두껍게 녀석의 침대에 배 깔고 드러누운 채 지냈다. 희망은 꾸준히 중얼거렸다. 


"나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필요한 글을 쓸 수 있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부모님의 볼 멘 소리가 전하는 메세지처럼, 정말 쓸모없는 사람은 아닐 거야. 나는 콩팥이 아니라 오장육부 중 하나라는 것을 언젠가 입증할 거야."


배 고픈 건 참을 수 있어도, 이러한 병신력의 연료가 되는 희망이 고갈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농부의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부단히 경작하며, 희망을 먹고 살았다. 맛있진 않았지만, 배는 늘 든든했다. 


정의신 사형정의신 사형


이십대 후반에는 용기라는 단어를 내내 상기했다. 알량한 연극 대본 하나 썼지만, 공연은 보기 좋게 망해버리고, 부랴부랴 간신히 회사에 취업했다가, 아니지, 아니지, 난 글을 써야 살지, 그런 맘으로 퇴사를 해버리고, 인도로, 아니 사실은 내가 한 번도 제대로 가보지 못 했던 내 안으로 떠나, 내내 뭔가를 허물어트리면서 줄창 뭔가를 설계하던 그 기간, 매순간마다, 나는 무서웠다. 무서웠던 이유는, 내가 나의 관성을 견뎌낼 수 있는, 나의 관성보다 더 큰 힘을 가지지 못 했다는 절망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상태였다. 인생 가장 파릇파릇한 시기의 끝물이기도 했다. 무서웠고,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계속 살아지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게, 사는 게 아니라, 계속 멈추지 않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살아지는 게 인생인 까닭에 절망감이 몰려오면 그 이후엔 꾸준히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습성이 베었던 것이다. 서울에 돌아온 후 즉시, 좀스러운 뮤지컬의 조연출 생활을 시작하고, 새벽 알바로 차비, 핸드폰비, 담배값 정도를 충당하면서도 내내 무서웠지만, 용기. 그래, 용기. 다시 또 세상한테 호되게 두들겨 맞더라도 내가 아사한다거나 객사, 또는 자살하지 않을 테니 계속 나아가자는 용기로 버텼다. 


그림은 모네


그리고 지금. 약간의 돈. 그것의 가치에 큰 힘을 얻고 있다. 이제 나는 담배 살 돈 없어 꽁초 주워 피고, 술 살 돈 없어 술 동냥 원정길을 떠나는 삶에서 완연히 벗어났다. 비루함에 쩔쩔 매지 않는다. 차비 걱정도 없다. 바지 주머니 가득 100원 짜리 동전을 넣고 다니지 않는다. 1시간씩 걷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이어트를 위해서라는 풍요의 상징 때문이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용돈도 준다. 얼마나 비약적인 물질적 진보의 이룩인가. 이 정도의 돈이 있으면, 취업 걱정에 이력서 쓰는 수고는 절대 없을 것이고, 느릿느릿하게나마 내 글을 지속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가끔은 내 주변 형, 동생들의 담배값, 술값, 택시비도 대신 내주면서 말이다. 물론, 내 집 같은 건 당분간 언감생심이겠지만. 그러니 정확히는 돈이 아니라 ‘약간’이라는 말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은 양의 돈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리고 너무 거대한 소비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말에는 약간의 오만함도 있는 걸 인정한다. 미래를 계획할 때, 급사라는 변수는 애써 생략하고 계산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절대로 그냥은 죽지 않을 거라는 희망과, 죽게 되더라도 마냥 네, 네, 물론입죠, 하며 쉽게 죽지는 않겠다는 용기와, 죽을 상황이 되더라도 병원 활용을 통해 생을 연장시켜줄 약간의 돈이 내게 있다. 나에겐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이 있단 말이다. 


그러나 짐짓, 채플린 마스터가 처음 했고, 정의신 선생님을 통해 처음 들은 이 말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하는 시점에 당도했다. 인간은 그저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욕심의 동물이고, 거지 같은 헌법에도 보란 듯이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히 채플린 마스터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에 얄팍한 단어 하나를 보태어 본다.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 그리고 ‘사랑’이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림은 모네


사랑. 작금에 이르러 구닥다리에 오글거리는 단어로 격하 당하고 있지만, 격상은 나의 몫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듯한 고통이 골백번 따르더라도, 내 피땀 흘려가며 상상하고 부활시킬 이 단어를 배신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김봉민의 작가는 소리 -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채플린 마스터와 정의신 사형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