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속하기 싫다. 약속이란 게 잡히면 그걸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이 날 짓이겨 눌러버리며 나의 무좀 같은 우울증 확장이 가속화 된다, 라고 하면 솔직히 오바다. 약속 잡은 그 시간에 내가 뭘 원하고 뭘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 약속의 시간이 확정적인 미래가 되는 게 싫다. 그래. 그냥 싫은 거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하기 싫은 거다, 라고 하면 절반 이하의 부정확한 서술이다.
난 약속을 잘 못 지키는 사람이다.
지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넌 새꺄, 사회성이 떨어져서 그래, 라는 힐난은 힐난이 아니라 적확한 지적이다. 난 사회성이 떨어진다. 약속을 정말 잘 못 지킨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개선되지 않은 채 이 나이까지 먹었으니 인정하기로 했다. 난 그런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약속하는 걸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게 나의 한계다.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앞으로 약속은 최소한만 잡을 것이고, 그 약속도 나에게 편한 시간대와 공간대만을 고집하겠다. 그걸 양해해주는 사람에겐 그에 걸맞는 감사한 마음의 표현을 하며 살 것이고, 양해해주지 못 하는 사람의 의사는, 당연히, 충분히 존중해야지. 대신 사회성 부족한 나도 그 사람과의 약속은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게 아니다. 자처하는 거다. 자처한 고립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과의 연결을 통해 기회를 도모하는 방식은 나에게 적합하지가 않아서 그 많은 불화가 발생한 것이다. 난 나 자신의 내적 관계망에 보다 신경을 기울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내가 굶어죽지 않을 방도는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나 편한 대로 사는 것에 좀 더 집중하려 한다.
나는 내가 못 하는 것을 덜 못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없는 것 탐하지 않을 거다. 내가 잘하는 것에 집중하겠다. 나에게 이미 있는 것에 의존하겠다. 근데 지금 여기에 쓴 이 모든 게 사실 나 자신과의 약속과 관련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약속 잘 못 지키는 나의 필연적 부족함이 발휘될까 염려도 해보는 사이, 2022년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약속을 최소한으로만, 할 것이다. 정말이지 최소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