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소풍 마치시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다 마친 그날,
나는 집에 와서 멈추지 않고 펑펑 울었던 게 아니다.
아니었단 말이다. 방구도 좀 뀌었고,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걸 볼까 궁리도 아마 했던 것 같고, 배고파서 신라면을 끓여먹었을 것이다.
완벽하게 슬픈 순간은 없다.
왜냐하면 완벽한 건 없으니까.
그러니 슬프기 만한 이야기는 현실적이지가 않다.
현실은 그런 게 아니다.
적당히 슬프고, 그보다 좀 덜 웃긴 것이 현실이리라.
나는 현실의 진실을 써보고 싶었다.
그런 게 가능해진다면, 인간형 쓰레기라 취급 받던 내가,
쓰레기형 인간으로 진일보한 것이라 기대했다.
그것에 나는 내 사활의 8할을 걸었다.
나는 아름다움에 관하여도 물색해보게 되었다.
실은 쓰레기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의 진실을 고민하는, 그냥,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인간이고 싶었고, 살아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미’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고
주워듣게 되었다.
우아미
골계미
완벽한 우아미란 없다.
완벽한 골계미도 없다.
완벽한 건 없다고.
현실의 진실이 알고 싶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아름다움도 적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적당한 우아미와 그보다 좀 더 많은 골계미가
섞인 게 현실이겠으나,
나는 적당한 골계미와 그보다 좀 더 많은 우아미가
뒤섞인 상상의 것을 써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허구적 상상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욕망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형 쓰레기라 취급 받기에
우아미보단 골계미가 갖춰진 형국이니,
내가 쓰는 것에서 만큼은 우아미가 골계미를
끝내 배분량을 더 차지했으면 했다.
내가 보는 현실과 내가 보고 싶은 상상을 짬뽕시켜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것이다. 그것이 미래적인 것이고,
진정한 현실의 진실에 가까운 게 된다.
따라서 나는 적당히 슬프고, 그보다 좀 덜 웃긴 현실을 융합시키고,
적당한 골계미와 그보다 좀 더 많은 우아미가 섞인 걸 써보고 싶었다.
그런 야심은 이뤄질 리가 당연히 쉬울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골병이라면 골병이 생겨버렸다.
많은 이가 나의 쓰레기 냄새에 이골난듯 떠났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다.
쓰레기가 아니다. 고군분투 하는 자의
땀과 피와 눈물 냄새를 그런 식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이제는 속지 않는다.
속지 않는다. 너희에게.
외할머니 생전에, 외할머니께서는 나를 목욕시켜준 적이 있었다.
중1 때 신경성 위궤양을 앓을 때였다.
그 순간의 피 같은 온도를 23년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게
바로 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를 다시 인간형 쓰레기로 취급하더라도,
언제나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나를,
내가 소풍 마치기 전까지
너희가 이길 방법은, 완벽하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신라면이 아니라 진라면을 먹고 자야 되겠다.